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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텅빈전단지 Dec 04. 2020

다음 생은 이탈리아 한량으로 부탁드립니다.

이탈리아, 소렌토, 포지타노, 아말피

On.

서울의 아침이 밝았다.

출근길. 아침햇살과 올림픽 대로의 교통체증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어제와 같고 내일도 변함없을 오늘을 때운다.

퇴근길. 도로에 꽉 찬 후미등 빛 때문에 눈이 아린다. 삼십 분째 서행으로 움직인 차선에 얌체 같은 녀석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슬쩍 끼어든다. 비상등 버튼 옆에 미사일 버튼이 옵션으로 들어간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귀가. 찔끔 남은 핸드폰 배터리의 잔량만큼 내 멘탈의 일일 스트레스 허용치도 간당간당하다.     

핸드폰을 충전하며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든다. 꿈속에서나 한가롭다.

Off.

Repeat;



2016년 10월

기차는 로마를 출발하여 소렌토로 달려갔다. 로마에서 흙먼지와 바가지요금, 집시들에게 너무 시달렸다. '유유자적'의 이탈리아를 느끼기에 로마는 적합한 도시가 아니었다. 비수기 평일 낮 기차에는 나의 가족과 할아버지 한분이 타고 있었다. 텅 빈 기차 안에서 드디어 이탈리아 특유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 오면 쉽게 '그러든가 말든가' 정신을 경험할 수 있다. 뭐든 대충대충이다. 요식업 종사자의 서비스 마인드조차 손님보다는 본인의 편의로 치중되어 있다. 특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교육된 우리로서는 경을 칠 일이지만 이 곳에서는 나라 전역에 만연한 관습이다.

다만 축구, 여자, 패션 등 특정 분야에 관해서는 이탈리아 남자들도 꽤나 열정적이다. 같은 기차에 있던 80대로 추정되는 할아버지 역시 체크 슈트+체크 셔츠+ 체크 넥타이의 조합을 완벽하게 소화해 보였다. 햇살에 가끔씩 반짝이는 잘 정리된 턱수염과 신문을 보고 있는 검은 뿔테의 눈빛에는 섹시함마저 있었다. 기차 칸을 오다가다 마주친 통로에서 할아버지는 싱긋 웃으시며 인사를 하였다.  감히 내 능력으로는 발끝도 못 따라갈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된 멋스러움이었다.

여유로움을 토대로 한 이 선택적 열정이 너무 근사했다. 자주 가던 해변의 식당에서는 정작 주문한 요리는 한 시간 넘게 걸렸지만 주문하지도 않은 오리지널 피자를 늘 선물 받았고, 'Close 4PM'이라고 써놓은 페리 티켓부스는 1시 뒤로 늘 닫혀 있었지만 마지막 날 짐과 아이의 페리 티켓을 공짜로 받았다. 촐싹거리는 시곗바늘도 녹아버릴 듯한 지중해의 배경은 덤. 모든 것들이 '그러든가 말든가'의 정신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던 날 성난 바다를 구경하며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바람에 카페 천막이 펄럭이는 소리, 지붕 위를 때리는 빗소리, 파도소리. 늘 내가 듣던 도시의 소음과는 대조적인 이 소음들이 되려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미쳤나 싶을 정도로 맛있는 커피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게 하였다. 우산은 없는데 비는 그칠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쿠키를 커피에 찍어 먹으며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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