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말서(始末書)

by 한지원

여름을 부르는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이런 날이면 남한강 줄기 두물머리 근처의 고급스러운 카페의 넓은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면서 사랑하는 그녀와 향기로운 커피를 한잔 먹으면 좋겠다. 나는 특별히 카푸치노를 좋아하는데, 이 커피는 테이크 아웃해서 빨대로 빨아먹으면 절대 안 된다. 빨대로 흡입을 하면 층층이 쌓인 거품과 시나몬 가루를 동시에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늬가 없는 흰 백색의 커다란 잔에 입을 대고, 달콤하고 향기 나는 시나몬가루와 부드러운 거품, 그리고 진한 커피를 동시에 쭉 들이켤 때 진정한 카푸치노를 느낄 수 있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실 때 입술에 묻은 부드러운 거품은 상대방의 키스를 부르는 입술로 변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확대해석은 하시지 말기를...

그러나 이렇게 봄비가 촉촉이 오는 날이면, 아무도 없는 시골버스 운전석에 앉아 삼백 원짜리 기계 커피를 마셔도 괜찮다. 비록 앞에 사랑하는 그녀는 없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버스 앞 유리창에 오버랩되어서 좋다. 그것이 아니라면, 버스를 타려고 승강장에 새벽부터 나와 계시는 할머니도 예뻐 보이는 아침이다.


'이 비가 그치면 산에는 푸른빛이 짙어 오겄다'

기억은 가물 거리지만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 있던 시구절이다.

괴산에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온 산과 들이 녹음으로 우거질 것이다. 모든 풀은 쇠어서 장작처럼 뻣뻣해질 것이요, 나무들은 퍼머한 시골 아주매처럼 풍성한 나뭇잎 숱으로 가지를 덮을 것이다.


봄이면 괴산의 산은 각종 산나물이 지천이다.

주변의 소도시나 혹은 청주에서도 괴산까지 나물 채취 원정을 오시는 아주매들을 자주 만난다.

특히 봄비가 내리기 바로 전의 시기가 절정기여서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성들이 버스를 타고 괴산 바닥을 헤집는다.


며칠 전 따뜻한 봄날 증평에서 아주매 두 분이 버스에 승차했다.

" 이 버스 청천 가나요? "

" 네! "

" 진더리도 가나요? "

" 네! 청천도 가고 진더리도 갑니다. "


보통 나물을 채취해서 생업을 영위하시는 분들은 시골 할머니 차림이시다. 전혀 화장끼 없는 얼굴, 몸빼바지, 쌀자루에 빨랫줄을 끼워 만든 배낭, 그리고 장화...

그러나 이 두분은 옷 차림새를 보아하니 도시에 사시는 아주매들이 나물 채취겸 봄 나드리를 가시는 것이 확실하다. 화사하게 화장한 얼굴, 알록달록한 등산복, 소위 메이커 등산화... 특히, 그날 아침의 아줌매는 진한 화장과 아침에 미장원에 들러 왔는지 사자머리 같은 풍성한 갈기가 보였다.

나물을 캐러 왔는지, 남자를 캐러 왔는지....


'진더리'는 나물 캐는 아주머니들의 천국이자 성지다. 증평과 청천을 오가는 사이에 있는 외딴 마을이데 봄이면, 근처는 물론 청주 같은 대도시에서도 원정을 오는 곳이다.

승객 한분이 '진더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렸다.

승객을 하차시키고 기어를 갈아 넣고 출발하려고 버스를 움직이는 순간....

룸미러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사자머리가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앉기를 기다리다 버스를 출발시켰다.

" 손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 진더리!"

"몇 천리 가시는 것도 아니고, 몇분만 가면 도착할 텐데, 자리 옮겨 다니지 마세요! 그러다 넘어지면 다치잖아요! "

" 버스 안 움직일 때 옮겼잖아요! 별걸 다 갖고 시비야! 애한테 나무라듯 하네...."

" 어이! 아줌마! 원인과 결과가 틀렸잖아요! 아줌마가 자리를 옮기니까 출발을 못하고 기다린 거예요! 그리고 말씀 가려서 하십시오! 제가 언제 시비를 걸었습니까?"

"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요! 참! 기분 더럽네! 내가 이놈의 버스 또다시 타나 봐라! "

" 아주머니가 버스를 또 타시든 안 타시든 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고.... 오늘 같이 아주머니의 부주의로 때문에 혹시 다치시는 일이 발생하면, 버스기사나 버스회사에 민. 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覺書)를 하나 씁시다."

"아니! 내가 왜 각서를 써! 못 써!"

그리고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애인인지 남편인지 모를 남자에게 오후에 데리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남자가 받았는지, 여자가 받았는지를 버스기사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궁금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그 사자머리는 전화를 스피커폰 기능으로 통화를 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사자머리가 '진더리'에서 내리면서 실랑이는 끝이 났다.


그리고 약 오 분 후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웬 여자가 사무실에 민원전화를 했는데, 버스기사가 본인을 애처럼 나무라면서 시말서(始末書)를 쓰라고 그랬다나....

한 기사님이 그랬냐고....

'아니 웬 시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각서 얘기를 했더니 껄껄거리면서 뒤집어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다시는 버스를 안 탄다고 했으니, 두 번 다시 그 사자머리는 볼일이 없겠지만, 한 번이라도 다시 보게 되면 그땐 꼭 시말서를 받아야겠다.


※추신 : 시말서,각서는 일본식 표현으로 경위서,서약서로 표현함이 맞지만 현장감을 살리기 위하여 사실 그대로 사용한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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