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문(名門) 고등학교 출신이다.
나는 비록 명품 인간은 아니지만 출신 고교는 명문이다. 나는 명문고교를 졸업한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 명문학교는 명성을 유지함에 동문 선. 후배님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쌓여서 바탕이 된다.
내가 졸업한 학교에는 깡패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한 분은 지리를 가르치시는 분 이셨고, 다른 한 분은 역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셨다. 두 분 중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우리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나보다는 23년 전에 나의 모교를 졸업하신 대선배(大先輩)님이 되신다.
굳이 두 분을 나누어 정의(定義) 하자면, 한분은 깡패 같은 선생님이고, 한분은 선생님이신데 깡패다. 그래서 우리 학우들끼리는 두 분 선생님을 지칭할 때 전자는 ~깡, 후자의 호칭은 그냥 '깡패'다.
"야! 너 깡패한테 한 번 맞아봤냐?"
"아니, 아직 그럼 너는?"
"응! 지난번에 교문 지나다..."
"그 인간은 왜 우리를 못살게 구냐?"
깡패 선생님에게 얻어맞고, 안 맞고가 우리 동문의 기준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깡패 선생님에게서 수업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 분을 매일 만났다. 이 분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계시는 곳이 교무실이나 교실이 아니다. 바로 학교 정문이다. 그것도 꼭 등교시간에...
올 하나 흐트러짐 없이 포마드를 발라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 인정미 없는 각진 얼굴, 검은 선글라스, 검은 트랜짓 코트, 무엇보다도 하이라이트는 검은 가죽장갑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풍겨오는 카리스마에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나는 마지막 교복세대이다.
교복이라고 지금같이 좋은 옷감, 디자인, 색깔은 물론 아니다. 일제가 물려준 잔재(殘在)에 추억이 묻어, 내놓고 그리워하지도 못하는 불쌍한 세대에서 입던 교복이다.
복장지도를 한다는 명목 하에는 꼬투리 잡기 좋은 품목이었다. 자매품으로는 두발 검사도 있었다.
깡패 선생님은 사랑하는 제자이자 후배들을 지도하시는데, 너무도 제자들을 사랑하시어 도구는 전혀 사용치 않으시고 친히 손으로 직접 어루만져 주셨다.
물론 검은 가죽장갑 낀 손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몸으로 친히주신 사랑에 대한 답으로, 처절하고도 강열한 몸부림으로 그 고통을 표현하곤 했다.
그런 행위 후 깡패 선생님은 격려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너희들은 다 잘할 수 있어! 모든지 하면 돼!
다음부터 잘들해! 알았지!"
2007년도로 기억된다.
내 나이 사십이 좀 넘어서...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동대문야구장에서 내 모교와 광주일고가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세 시간 반이 넘는 혈투를 치르고 스코어 10대 9로 석패(惜敗)를 하여, 나의 모교가 준우승에 머물렀던 아쉬운 경기였다.
나는 대충 업무를 끝내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 나 오늘 야구 구경 가는데 애들하고 같이 올래! "
동대문야구장이 곧 없어진다고 하여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3~4회쯤 되면, 응원석 위로 빵이나 우유, 주스팩들이 날아다닌다. 동문들이 기부한 간식을 스탠드 앞에 있는 비교적 젊은 동문들이 응원석 구석구석으로 던지면,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받아먹으면 된다.
경기가 고조되는 7~8회쯤 되면, 간식 메뉴가 바뀐다. 소주팩과 오징어나 쥐포로... 특히, 뒤지고 있거나 엎치락 뒤치락할 때면 더 그렇다.
"아빠!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오징어 구워서 던지래!"
같이 경기를 관람하던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얘기한다. 재미있는 추억이라도 건졌으니 나는 야구장에 애들을 몰고 온 본전은 챙겼다.
"그냥 집에 가기 그런데... 우리 장충동 족발 먹고 가자!"
늦은 시각이어서 영업을 종료한 집들이 꽤 있어서 선택의 폭이 좁았다. 한 무리의 시커먼 패거리가 이층 자리를 차지한 집이었지만, 나도 모교의 아쉬운 패배로 마음이 허한 터라 한 구석에 앉아서 아내와 그리고 두 아이들과 함께 족발을 먹고 있었다.
식당 안이 시끌벅적하고 그 패거리들이 하도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마음이 부글거려, 조용히 좀 하시라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위 쪽수에서 밀리고, 광주일고 출신들이라는 생각에 찍소리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더구나, 얼굴을 맞대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집사람의 눈이 무서워 아무 말 없이 죄 없는 족발만 질겅거리고 있었는데...
"야! 잘했어! 자! 건배!"
'이 자식들이 이겼다고 축배를 들어? 이 놈들이 이 가게 전세를 냈나? '
아직은 피 끓는 사십 대에, 지금이라면 불가능하지만 아직 마누라가 고양이에서 호랑이로 바뀌기 전이여서 집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과감히 일어나면서 돌아섰다.
그 순간
" 다음에 잘하면 돼! 내년에는 우승할 수 있어! 실망하지 마!"
후속 멘트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광주가 아니고 서울이네...'
도로 앉아서 족발이나 뜯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관성의 법칙은 돌아서기 시작한 몸을 그대로 진행시켜, 나를 뒷 자리의 일행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테이블 세 개 정도를 붙여놓고 가운데 카리스마 넘쳐 보이는 한 분과 주변에 그분의 수하(手下)로 보이는 패거리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구도로 앉아 있었다.
진즉에 알아봤어야 했다.
'헉~깡패다!'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력에 끌리는 고철 덩어리처럼 나도 모르게 그 모임의 가운데 이끌려갔다.
양손을 양복 허벅지에 슬슬 문지르면서,
상체는 앞으로 15°정도 기울인 체...
오뉴월 한낮에 축 늘어진 쇠불알 모양,
모가지에 매달린 넥타이가 덜렁거렸다.
그리고는 아주 비굴한 모드로...
"선생님! 서울고 35회입니다."
모세의 기적처럼 깡패 선생님 주변의 수하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나는 양복바지에 문지르던 손을 앞으로 내밀어 선생님께서 청하신 악수를 하였다.
"음! 그래! 열심히 잘 살고 계시지?"
"네! 아주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래! 나중에 한 번 만나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내 자리로 돌아와 경멸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식구들 앞에, 나는 죄인인양 족발 접시에 머리를 처박고 배신자의 살을 씹듯이 족발만 뜯었다.
깡패 선생님은 나의 페북 친구다.
아직도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먼저 페친 신청과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 주신다.
얼마 전에 페북에 선생님의 최근 사진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많이 연로해지시고, 눈매가 선(善)하게 변하셔서 예전보다 한결 인자해 보이셨다.
깡패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