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밀레- <만종>
프랑스 그레빌의 농지는 몇 년 전까지 작물들이 잘 자라났다. 밀, 감자, 옥수수를 추수하는 계절이면 땅을 온종일 땅을 일구는 소작농은 열심히 일을 한 보람이 얼굴에 묻어났으며, 땅 지주들은 수확물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비가 와야 할 때는 거의 오지 않고 무심하게 햇빛만 메마른 땅을 데웠다. 처음 1년은 마을 사람들이 한 해가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가득 찬 마을 곡식 창고로 1년은 잘 버텄으나 한 해가 더 지나고 3년째가 되자 마을 사람들은 점점 두려움에 사로 잡히고 있었다.
" 빌, 오늘은 감자라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지친 아내가 물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흙먼지가 가득한 품 안에는 4살짜리 딸아이 르네가 안겨있었다. 르네의 눈은 아이들의 호기심과 세상의 신비로움을 전혀 담지 못했다. 흐릿한 눈망울은 어미만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나도 일하면서 주인님께 부탁했는데 3일 뒤에나 줄 수 있다고 하네... 우선은 이걸로 좀 버터 봅시다."
윤기 없는 낡은 나무 식탁 위에는 세가족의 유일한 먹거리인 옥수수죽이 있었다. 하지만 죽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했다. 물과 다를 바 없었다.
"르네가 못 먹어서 그런지 말도 없고 하루 종일 집안에서 누워만 있어요. "
아내의 걱정은 날로 깊어졌다. 아이가 말을 잃어 갈수록 아이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아침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일을 하다가 끼니때 잠깐씩 집에 들러도 아이는 누워서 멍하니 천정만 보고 있었다.
"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요?"
지친 아내의 힘없는 말에 빌도 대답 없이 자신의 마음처럼 차게 식은 남은 죽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년 가까이 농사일을 하면서 이렇게 절망적인 경우는 없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마을에서는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작년에 마을에서는 한 여인을 마녀로 몰아서 화형을 시켰다. 중세시대 후로는 금지된 일이었지만 그 여인의 집에는 마을에서 몇 년 전에 사라진 몇몇 아이들의 소지품이 발견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증오심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 여인이 자기는 길에서 주운 것이라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는 실제 불길로 여인을 태워 버렸다. 여인은 그 뜨거운 불길에서도 고통스럽게 소리 지르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는 말로 저주를 퍼부으며 검은 재로 변해버렸다.
마을 주민들은 일을 마치고 모이기만 하면 그 일을 떠올리며 자신들이 했던 짓이 그 여자의 노여움을 샀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메말라가는 땅을 누구 탓으로 돌릴 생각마저 배고픈 현실 앞에서는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주인에게 감자 한 꾸러미를 받기로 한지 이틀 뒤 옥수수 알갱이도 거의 없었다. 먹을 거라곤 마실 물이 전부였다. 빌은 아내에게 오늘까지 일하면 내일은 감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짧게 이야기했다. 일찍히 빌과 아내는 메마른 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는 아이를 안아주고는 오늘은 배불리 저녁에 먹자고 이야기하고 아이에게 작은 소리로 기도하고 나왔다.
야속한 햇빛은 땅을 더 굳게 만들었다. 겨울에 보리를 심기 위해서는 땅을 고라야 했다. 빌은 힘껏 땅을 내리쳤다. 갑자기 곡괭이 자루가 부러지면서 둔탁한소리를 냈다. 빌의 아내는 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침대 위에서는 르네가 누워있었다. 한쪽 손이 낡은 침대 아래로 쳐져있었고 눈은 허공을 응시했다.
"르네!!"
아내의 목소리는 방안의 무거운 공기를 깨트렸다. 곧 빌이 달려왔다. 딸아이의 죽음 앞에서 빌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은 아이를 어디엔가 묻어야 했지만 빌에겐 땅도 없고 돈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오늘 주인에게 받을 빈 감자 자루뿐이었다. 두 사람은 딸을 바라보며 힘없이 기도했다. 빌은 딸아이를 자루에 고이 담고 끈으로 묶었다. 낡은 수레에 싣고 아내와 빌은 자신들의 일터로 향했다.
빌은 농사짓는 밭 귀퉁이에 구덩이를 팠다. 갈라진 손으로 파는 내 내 눈물이 계속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내와 빌은 맘속의 원망을 잠시 내려놓고 기도했다. 지평선 뒤로는 해가 지면서 메마른 땅을 황금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밀레는 고향 마을을 둘러보다가 황금빛 노을에 비취는 두 소작농 부부를 보았다. 그들은 마치 일을 마치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는대도 너무 감동스러웠다. 남자는 모자를 쥐고 고개를 숙이고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했다. 눈에는 눈물까지 흐르는 듯이 보였다. 황금빛 노을과 함께 너무 아름다웠다. 밀레는 가슴 깊이 이 장면을 새겼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밀레는 눈을 감고 다른 것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부부의 모습을 꼭 그림으로 그리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