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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5. 회사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by Noelle

9월 중순, 갑작스레 TFT에 배정되었다. 팀 내 수요 조사가 돌 때 분명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인사 결정을 전달받았다. (지나고 나서 메일을 보니 팀장님과 면담을 하러 들어가는 동시에 내 이름이 담당자로 회신되어 있었다) 하필 한창 바쁜 시기였다. 실험은 쌓이는 데 인원은 부족했다. 함께 야근 시간이 착실히 쌓여가던 내 그룹원들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을 것이다. 여러 번 여의치 않은 상황과 어려움을 어필해 보았지만 결국엔 상부 결정에 따랐다. 급하게 하고 있던 업무들을 동료들에게 인수인계하고, 11월 초 예정되어 있던 휴가 일정을 조정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새로운 일이나 열심히 배워보자 마음먹었다.


그 후 이어진 3주간은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다. 본사는 연구소와 인프라도,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 층마다 있는 라운지와 높은 전망, 새로운 간식과 음료가 매일 가득 채워지는 냉장고에 나는 시골쥐처럼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런 인프라를 누리는 본사 사람들이 그저 부러웠는데, 막상 그들의 업무에 깊숙이 들어가 보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다른 본부 사람들은 나와 사고방식이나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원인을 추론하고 현상을 분석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그 결과물을 확장해 고객 경험으로, 혹은 그 이상의 메시지로 만들어 냈다. 거시적인 세상을 처음 본 느낌이었다. 긴 학위 기간과 연구소 생활을 거쳐오는 사이 내가 근시안이 된 것을 새삼 느꼈다. 투입된 업무는 짧은 기간 내 결과물을 내야 하는 프로젝트다 보니 밤 10시, 11시에도 메일 루프가 활발하게 돌아갈 만큼 압박도 높고 정신없는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업무와 사람들을 보고 배우며 나름 열심히 따라갔다.


시작도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끝도 내 뜻과 전혀 상관없었다. 국내외 정세를 의식한 고위경영층의 정무적인 결정이 있었고, 그렇게 이번 추석 연휴 전 날 전화 한 통으로 프로젝트가 갑자기 끝이 났다. 처음엔 모두가 그 프로젝트에 부정적이었지만 서로 부딪혀가며 의견을 어째저째 모아 조금씩 손에 잡힐 듯한 형태로 맞춰져 가던 참이었다. 바로 그 전날까지도 이게 될까 싶던 게 이제 뭔가 되겠다 하고 생각되는 그날, 프로젝트가 사실상 종료되었다. 분명 연휴를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아야 하는데, 마냥 좋지가 않았다. 출장지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따금씩 정적이 돌았다. 분명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인데, 이제 와서 이게 중간에 멈췄다고 이렇게 섭섭할 일인가 싶었다. 며칠만 일찍 끝났었다면 덜 허무했을까, 윤곽이 잡히는 때 손에서 스르륵 흘러나가니 그저 헛웃음이 났다.


헛헛한 마음을 품고 집에 와 간단하게 한잔 했다. 휴가를 미룬 것도 그냥 잘됐다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회사 일이라는 게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우리는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으로 툭툭 털고 일어나는 수 밖에는 없다. 연휴가 끝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또 남은 올해를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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