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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9. 겨울 이불 꺼내던 날

by Noelle


오늘은 겨울 이불을 꺼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가을이 오기는 오나 싶을 정도로 덥더니, 긴 비가 내리고는 온도가 훅 내려갔다. 이불 교체는 단순 이불 빨래보다 번거로워서 살짝 미루고 있었는데, 아침을 시원하게 재채기로 시작하면서 아침을 다 먹자마자 이불 커버부터 분리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연달아 바쁘게 도는 동안, 담요 속 곤히 자고 있던 우리 집 할아버지 고양이를 깨워 가을볕이 드는 카페트에 같이 앉았다. 창에 편광필름을 입혔는데도 가을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눈이 부셨다. 고양이가 온몸으로 내는 고르륵고르륵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찬란한 여름에 관한 책을 읽는데 괜히 마음이 헛헛했다. 유독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또 한 해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올여름 나에게 강렬했던 기억은 뭐였을까. 사진은 무수히 쌓였는데 특별하게 생각나는 한 사건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새롭고 특별한 일은 줄어들기 마련이라는데,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싶어 폰 앨범에 사진을 넘기며 되돌아보니 역시나 별 큰 일은 없었다. 그저 많이 먹고, 많이 마셨다. 뭐, 생각해보니 내 나름 즐겁고 찬란했던 여름이었던 것 같다. 뭐 특별한 일이 꼭 있어야 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며 즐거운 시간 보내는 게 찬란하고 눈부신 여름인거지.


가을볕을 더 즐기려 책을 내려놓고 뛰러 나갔는데, 찬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며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비염 때문에 계속 코를 닦으며 뛰어야 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못볼꼴을 보여준 듯해 죄송했다, 하지만 한강에 쑥과 환삼덩굴을 다 뿌리 뽑지 않는 한 어쩔 수가 없다), 뜨겁고 습하던 여름동안 틈틈이 뛴 덕에 역치가 높아졌는지, 가볍게 잘 뛰어졌다. 이번 여름이 나에게 남긴 게 행복으로 가득 쌓인 오동통한 하체와 처서매직이라면, 뭐 그것도 나름 내 찬란한 여름의 흔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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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