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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Feb 03. 2021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눈은 푹푹 나리고,  나타샤를 그린다.  아름답고 절절한 이름 사랑...


연애는 감정의 문제이기에 상대를 더 좋아하는 이에게 가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덜 좋아하는 이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갑을’ 관계 같은? 감정의 무게가 다르다는 현실을 잘 알면서도 나는 매 번 불리한 게임에서 혼자 달렸다. 그것도 너무 빨리, 경주마도 아니면서. 


감정의 추가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기울인 상황, 기울기만큼이나 속이 끓었다. 불안과 염려는 기본이었다. 그의 말투, 표정, 눈빛을 읽기 위해 촌각을 곤두세웠다. 그의 한숨 소리에도 반응하는 나는 어떤 존재였던가? 그 어디에도 나의 존엄성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별일도 아닌 것에 언제나 요동치곤 했다. 급하게 자동 반사한 나는 까칠하기로 유명했다. 시간이 약인 건지, 인내심이 늘어난 건지…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무색하리만큼 어느새 수더분하게 변해 있었다. 느긋한 그를 만나 좋은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서로에게 적응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의 관계가 시험대에 올라도, 이전과 다르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와 보내지 않은 주말에는 엄마와 퇴촌 한증막에 갔다. 서울 시내 맛 집도 다녔다. 그 없이 잘 지내는 방법을 나름 터득하고 있었다. 날씨가 풀린 포근한 날 ‘길상사’로 향했다. <무소유> 법정스님을 좋아하는 엄마의 아이디어였다. 큰 기대 없이 외로운 마음을 숨기고 효도나 할까 하고 들어선 길상사. 


키가 큰 관음보살상 조각이 눈에 띄었다. 전혀 불교 느낌이 나지 않은 예술 조각처럼 보이는 동상을 한참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가 종교 간 화해와 화합을 염원하며 기증한 거라 하였다. 흐뭇함과 동시에 훈훈함이 퍼졌다. 


울창하지 않지만 숲 느낌이 제법 진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고목과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곳곳에 돌로 만든 이색적인 벤치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졌다. 마치 고풍스러운 유럽의 정원에 들어 선 것만 같았다. 


이곳이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유명한 ‘대원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야 수려한 경관과 기품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다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를 듣게 되었다.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잘생긴 외모로 당시 뭇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기생 김영한에게 첫눈에 반해, 로맨티시스트인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백석은 이백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아호로 그녀를 불렀다. 둘은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유학파에, 당대 최고의 직장인 함흥 영생 여고 영어 선생이던 아들이 기생과의 동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강제로 다른 여자와 혼인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하였다. 백석은 자야(子夜)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자신이 백석의 장래에 해를 끼칠까 거절하였다.  


만주에서 홀로 된 백석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지었다. 잠시라고 믿었던 이별은 3.8선이 생기고, 그만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김영한은 훗날 당시 시가 1,000억 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였다. 


"그까짓 1000억 원은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다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화려한 길상사와 사뭇 다른 길상헌에서 나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빠져 들고 말았다. 천문학적 재산에 한 치의 미련도 두지 않은 그녀, 애인을 칭송하고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한 자야. 그녀는 어떤 여자일까?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머물던 작은 절간, 길상헌에 앉아 이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닐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섬광처럼 짧고도 강렬해서 그런 걸까? 푹푹 나리는 설경 때문인 걸까? 그들의 운명 같은 사랑은 ‘닥터지바고’를 떠오르게 하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설경, 신비로운 눈보라에 눈을 반짝이는 지바고의 감성, 서슴지 않고 당돌하게 행동하고 도전하는 라라. 


지바고는 의사 신분이지만 백석처럼 시인이 되기를 바란 자유사상가였다. 몸부림치던 혁명 속에서 피어난… 지바고와 라라의 숨 막히도록 극적인 사랑. 그리고 백석과 자야의 가슴 절절한 로맨스. 그들은 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나의 애달픔에 견줄 수 있겠냐만, 먹먹해지는 마음에 눈물이 솟구쳤다. 세월이 지나고, 그들도 언젠가는 잊히겠지. 하지만 이들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리라 마음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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