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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Feb 08. 2021

잔인한 계절

잔인한 계절 사월, 마지막 꽃샘추위는 늘 그랬듯이 지독하게 매서웠다.


평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그를 보면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오분 이상 미적거리는 모습에 웃음도 나왔다. 어떻게 기분 좋게 깨울 수 있을까?


그가 맞춰 논 알람보다 이십 분 먼저 울리게 설정했다. 먼저 두 손을 비벼 열 낸 손바닥을 그의 눈에 살포시 얹었다. 나의 온기가 그의 홍채 안으로 스며들기 기다렸다. 그는 잠든 아기처럼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눈썹부터 살며시 눌렀다. 이마, 관자놀이, 볼, 턱, 인중, 혈자리를 지압하듯 꾹꾹. 목과 어깨, 가슴, 팔과 배를 나의 긴 호흡에 맞춰 지그시 누르고 어루만졌다. 나의 정성스러운 손길과 고요한 숨결을 느끼며 최상의 아침을 맞이 하기를…


이러다 갑자기 나를 격하게 안기도 했다. 그저 산뜻한 출근을 위해 시작한 마사지가 모닝 섹스로 선물 받게 될 줄이야! 새근새근 얌전한 아기가 헐크로 돌변할 줄은!


그는 누구든 자기 몸을 만지는 걸 싫어했는데, 이렇게 좋은 건지 미처 몰랐다 했다. 나와 사귀면서 가장 큰 만족으로 마사지를 꼽을 정도였다. 하루를 마감하며 함께 눈을 감고, 설레는 기분으로 눈을 뜬다는 게 얼마나 행복인 지, 충만한 삶에 감사했다. 그를 회사에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꼬꾸라져 잠들었다. 나는 그 후로 한참 일어나질 못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에 의해서 만난다고 하는 데, 당신은 나에게서 뭐가 필요해요?”


“글쎄, 내가 필요해서 인 건 모르겠고, 너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답이 될까?”


그는 언젠가 도전되는 내 성격을 말한 적이 있었다. 예민하게 날이 서있는 점, 분석하길 좋아하고, 의심하면서 따져 묻는 질문, 그리고 투 머치 토크. 요점만 간단히 말하도록 연습해 보라고 했다.


그의 조언에 따르려 했다.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면… 필요했다. 아, 오랜 습관에 나는 좌절했다. 습관은 강력한 유혹이었다. 쉬운 일과 반복이 만나면 습관이 만들어진다 하니, 나는 익숙한 일로 시작했다. 메모하고 눈에 띄는 곳곳에 붙여놓기가 그것이었다.


그날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 개발할 것> 이라며 메모장에 이렇게 써 두었다.

 

1. 말로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설명, 묘사, 스토리, 그만 멈추고, 미소 짓고 행동한다.

2. 질문하지 말고, 그의 공간 열기에 힘쓴다. 기다리고, 관대하게 존재한다.

3. 10의 1을 살고, 10의 9를 기부하는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나를 채찍질하였다. 하지만 갈수록 나는 지쳐만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고독하게 걷고 있다는 생각에 자주 빠졌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표시는 무엇일까?"


"나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게 해주고 싶은 걸까?"


나는 다시 나에게 함몰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풍부한 내부 세계에만 자신의 감정을 가둬 두고 는 그가 보였다. 감정만이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결정한다고 믿기에… 이성에게만 행동할 권한을 주는 그를 이해하기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약한 함정에 또 빠져든 것이다.


마지막 꽃샘추위는 늘 그랬듯이 지독하게 매서웠다. 사월, 눈발이 휘날리는 날, 뛰다가 넘어졌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났다. (어린애도 아닌 데, 뛰다가 넘어지다니…) 붉은 피가 맺힌 걸 보고 있으려니, 아픈 것보다 처량하고 서러워 눈물이 났다. 아파 울고 있는 날 보면 안쓰러워할까? 내 모습을 사진 찍어 그에게 보냈다.

 

“한 번만 더 넘어져서 다치면 내 손에 죽는다!!!” 이 말과 함께 그는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나는 것보다) 당신의 무심함에 마음에 멍이 드는 게 더 아프다고, 이 바보!’

 

다친 나를 걱정하는 말을 들어도, 염려가 담긴 이모티콘을 봐도, 그동안 쌓인 원망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한 번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가슴 깊이 억누른 미움과 분노가 눈물로 쏟아져,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휘몰아치는 세찬 눈과 함께 흩어져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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