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휴가를 내고 보드 타러 간 적이 있었다. 주말에는 종종 친구와 골프를 쳤다. 주중에는 갤러리스트와 만나면 새벽에 귀가하곤 했다. 그중 나에게 허용된 시간은 없었다. 그를 못 보는 동안 허전한 마음을 달래러 나는 친구를 만났다.
“세라, 너랑은 대화가 착착 감겨.
내 말이 너의 귓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걸 느끼는데,
그와는 마치 내가 뱉은 말이 고체가 되어, 바로 발 밑에 떨어지는 것 같아.
언어가 전하고자 하는 나의 뜻을 오히려 변형이라도 시키는 듯 말이지.
우리의 입술은 대화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닌 것 같아.”
“연인이라서 다행이네, 말이 거추장스러워도 상관없으니”
동네 벗으로 이십 년을 쭉 지낸 우리는 한 번도 못 보고 한 해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을 친구로 서로를 여겼다. 세라는 내가 노숙자가 되어도,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도 늘 그녀 자신을 찾을 거라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극명한 대비가 웃겨 그 말을 가벼이 넘겨버렸다. 긴 세월- 걸음마를 막 뗀 그녀 아이가 군대를 갈 만큼- 이 지난 지금, 중간 지점 어딘가에 사는 우리는 서로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음에 편안함을 느꼈다.
“세라, 진정 내가 바라는 거 말이야, 생각, 감정, 행동이 일치할 때, 평안을 느껴.
고요해져. 동시에 관대하고 단단한 힘이 느껴져.
새삼스럽지만 요즘 들어 이런 내가 좋아.
자기 의심이 사라지면서 마음의 평화가 수묵화처럼 퍼지는 기분이야."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최근에 얻은 깨달음을 나누었다. 나의 삶에 어떤 퍼포먼스를 일으키는지도...
"지혜로워진다는 게 이런 걸까?
뭐 대단한 걸 깨닫거나 비밀을 알아낸 게 아닌,
그냥 편안하고 여유로운 거?
무디거나 놓치거나 지루한 루틴은 아니고…
산뜻한 호기심, 영민함이 살아있다는 감각이랄까?
이런 소녀감성으로 <인색한 남자 & 섭섭해하는 여자의 연애 이야기>라는 글을 써볼까 해.
예전에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아름다운 삶에 대해> 제목으로 러브스토리를 써 보고 싶었어.
가볍게 쓰는 게 요즘 트렌드에 맞을 것 같아.
그와 연애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역설적으로 써 보려고.
인색한 남자를 섭섭해하지만 꿋꿋하게 만나면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알게 되고,
스스로 진정한 자아를 찾아 온전해지는… 가볍지 않은 모티브를 무겁지 않게 쓰는 에세이, 말이야.”
“글을 쓰는 건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보다 그와 결혼하고 싶은 이유라도 있는 거니?”
“깔끔한 화법? 라이프스타일?
이를테면 여행을 좋아하고, 자전거, 등산 등 취미가 같아서 좋고,
스마트하고 신중한 성격이 믿음직스러워.
나의 단점을 보완해 줄 남자이고.
무엇보다 미소가 예쁘고, 목소리가 아주 감미롭지.”
“음, 너의 반짝반짝하는 겉모습에 그만 멈추지 않았나 보군”
“후후, 맞아. 그도 처음에는 내 외모가 영 마이너스였대”
“너의 진실을 보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럭비공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도 적응하기 만만치 않았을 테고”
“그래, 너 말대로 나의 외모, 성격 다 탐탁지 않았어.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 아니겠니? “
“음, 결혼하기엔 망설이는 이유가 넌 있을 것 같은데?”
“맞아, 칭찬과 표현이 약해서 신나지가 않아. 이벤트도 없고, 밋밋해.
파이팅이랄까? 에너지를 느끼기엔 뭔가 아쉬워.
한마디로 인색해!”
그녀는 우주와 자연과 존재, 그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주제를 좋아했다. 반면 나는 예술과 남자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수다를 찐하게 나누고 나면 정맥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힘이 났다. 마치 사이다를 마신 것 같은 청량감으로 가슴이 뻥 뚫려, 다음을 기약하는 둘도 없는 솔메이트이다.
“내가 누구인가? 무엇을 하며, 어떤 생각을 소유하는 게 진정 나인가?
이런 고민이 바로 너의 존재 이유이고, 본능이라는 것은 잘 알겠어.
하지만 그게 너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자유를 원하지 않고 생존 이유로써 고뇌하는 삶을 사랑한다면야, 할 말 없지만.
나에겐 생존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완전한 결합, 한마음으로 함께 하는 거란다.
괴테도 그런 말을 했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라고.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뭔가 버금가는 일을 찾아야 할 텐데.
날 외롭게 하는 이 남자로 분명해진 건, 글을 쓰겠다는 결정이야.
그를 이해하고, 아니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면...
무엇보다 나답게 하는, 가치 있는 게 뭘까 많이 생각해봤어.
때때로 유혹적인 제안이 오기도 하지.
잊혔다고 생각한, 매력이 여전한 남자에게 연락이 오기라도 하면, 살짝 흔들리기도 해.
하지만 아주 잠깐이야.
십오 분이 지나면 정말 귀찮아진단다.
어서 노트북을 켜고 나의 남자를 떠올리며 뭐라도 끄적거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된다고."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와의 연애에서 느낀 점이 예전과는 달리 나를 돌아보게 하고, 관점을 확장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 주었다.
"301호나 302호 아저씨는 다 똑같다는 말이 이제는 좀 알 것 같아.
뱃속에서 나온 내 새끼도 너무나 다른데, 70억 인구 그 누구도 똑같은 사람이 없지.
그런데 ‘옆집 남자나 아랫집 남자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됐을까?
'남자 친구 사용 설명서'를 만들기도 하고, ‘사랑의 목록’도 작성해 봤어.
그와 잘 지내기 위해 소통 강의를 듣고, 관계를 위한 세미나도 참가했어.
하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연애에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더라.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일로 그와의 부정적인 감정을 미뤄놓기도 하지.
만성피로처럼 켜켜이 쌓아둔 원망과 후회와 미련에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어느새 또 슬리퍼를 끌고, 머리를 질끈 묶고, 푸석한 민 낯을 선글라스로 가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의 팔짱을 끼고 걷고, 브런치를 먹고 있는 나를 보게 돼.
세라, 진심을 다해 사랑해 본 적 있니?”
“글쎄, 난 사랑을 안 믿어.
사랑은 없다고 봐, 그래서 인간은 없는 것을 증명해내려고 사랑을 추구하는 거라 생각해.
사랑하면 내가 사라지는 게 두려워.
나의 존재 자체가 흐물흐물 흐트러지고 난 없어지고 말 거야.
난 그래서 사랑을 안 해.”
“낭만적이고 센티해지고, 그렇게 흐느적거리고 싶지는 않니?”
“음, 가끔 그런 욕구가 올라오긴 해.
그러다 그뿐,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난, 나의 존재 이유에 몰두해.
난 뭔가? 날 가장 생동감 있게 하는 건 뭘까?
결국은 창작, 글쓰기나 가든닝 이더라.”
그녀의 말은 ‘앤디 워홀’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도 침대 위보다는 영화나 책이 훨씬 자극적이라 했다. 모르는 사람과의 사랑이 더 극적이고, 아예 만나지 않은 사람과의 섹스가 가장 강렬하다고. 이 말은 나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아내나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동을 보면서, 가상세계의 그녀와 사랑을 나누다니.
그는 묘비명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차라리 가상인물로 남길 바랬다. 앤디 역시 ‘세상은 비어있고,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거겠지.
“왜 실체를 경험하려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앤디 워홀’처럼 너의 정체성, 자의식에만 집착하려는 거니?”
“나보다 불나방처럼 불에 미쳐, 죽어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불에 날아드는 널 보면, 참 안타까워.”
“아니, 세라, 난 불에 타 죽지 않아. 사랑은 결코 날 죽게 하지 않아.
다른 나를 만나게 하지. 그때 나는 죽어도 괜찮아. 난 다른 존재로 바로 태어나.
사랑만큼은 난 불사조야.”
“불사조처럼 매일 태어나는 에너지를 사랑 말고 너한테 쏟아보렴, 제발.”
메타세쿼이아 숲길은 다음에 나눠야지 그녀와 헤어지며 생각했다. 양희은보다 더 영롱하게, 이소라보다 더 구슬프게 노래하는, 내 친구 세라의 노래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끔씩 친한 커플과 더블데이트한 게 기억났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잘 들었다. 즐겁게도 웃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 얘기는 하지 않아 모두가 아리송했다. 내 지인은 그가 인상이 좋고, 선한 사람 같아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다고…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인의 말을 그다지 마음에 두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를 위해 내는 휴가를 나를 위해서는 내지 않는지, 그의 무심함에 가슴이 아팠다.
그의 아내가 된다면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까? 뜨거운 여름이 가고, 쓸쓸한 가을과 추운 겨울도 가고, 나른한 봄을 그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나의 외면적 사랑 & 그의 내면적 사랑, 상반된 사랑을 하니 모를 수밖에 없다고 치부하였다.
“그냥 다른 거다. 그런 거다.
난 그저 이대로 사랑하면 된다.
나답게 존재하고 그를 인정하련다.
우리에겐 서로 다르게 느끼는 시간의 갭이 있을 뿐, 괜찮다.”
후 우~~~, 체념 섞인 탄식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방금 내뱉은 덤덤한 말을 제대로 인지하고서 하는 말인가? 반문해 보았다. ‘아이폰’의 ‘시리(Siri)’처럼 읊조리기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