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치고 나면 언제나 기분 좋은 땀과 콧노래가 나왔다. 춤도 절로 나왔다.
모든 게 한 순간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고양이 마냥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익숙한 체취, 살결, 숨소리에 취했다. 이대로 편안하고 몽롱하게… 꿈을 꾸듯 서로 포개어 늘어져, 고요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내 영혼이 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할 때 진정한 평안을 느끼듯이 말이다.
우리는 주말,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달짝지근한 프랜치 토스트를 구웠다. 커피머신으로 훌륭한 홈카페가 만들어졌다. 그가 해주는 거품이 부드러운 카페라테를 기다렸다. 우유 거품을 만들기 위해 정성 들여 젓는 그의 뒷모습에 껴안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일었다. 길지 않은 그 시간, 촉촉한 눈빛으로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머그잔을 건네는 그에게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비록 슬립 차림이지만 그의 눈을 보며 우아하게 라테를 마셨다.
뭔가를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를 하는 나를 그는 자주 뒤에서 끌어안았다. 브람스 소나타의 감미로운 선율처럼, 나의 뒤태를 휘감는 로맨틱한 몸짓에 그만 녹아내렸다. 그럴 때마다 어디서 본 듯한 뮤직비디오의 여주인공처럼 나는 수줍어했다. 이 맛에 설거지를 한다고 마음속으로 좋아라 하면서… 아직도 나의 허리를 감싸 안는 그의 두 손과 귀와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그의 입술을 잊을 수가 없다.
살짝 쌀쌀한 날씨지만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 기분 좋게 제법 땀이 등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는 요리하는 걸 즐겼다. 그가 직접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나를 보는 게 흐뭇했던지, 언제나 양을 넉넉하게 하였다. 덕분에 우리는 점점 푸짐한 사이즈가 되어갔다. 급기야 코로나 바이러스로 스포츠센터도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홈트를 하기로!
그는 닌텐도 스위치 링 피트 어드벤처를 구매해 운동하는 걸 알려주었다. 이따금씩 강도를 높이면 10분만 해도 숨이 찼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한 타임을 30분으로 세팅을 맞춰놓고 서로 번갈아 가며 했다. 그래야 나는 겨우 따라 할 수 있었다. 닌텐도 스위치에 마리오 테니스 에이스도 있었다. 마리오는 물론 그였고, 마리오의 파트너로 피치가 되어 한 팀으로 테니스를 쳤다. 상대팀에 나온 데이지를 이기려고 얼마나 팔을 휘둘렀던지, 며칠을 고생하기도 했다.
나는 춤추는 걸 좋아하지만 살짝 박치가 있다. 그는 올해 몸치 탈출하라며 저스트 댄스 칩도 사주었다. 저스트 댄스를 틀고 열심히 흔들어대는 나를 보며 그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놀리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는 건지 통 알 수 없었다. 나는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숨이 턱턱 매어도 끝까지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근처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공터 안에 설치된 기구를 이용해 근력운동도 하였다. 자전거 타며 파리공원도 돌았다. 매섭게 불어닥치는 꽃샘추위와는 아랑곳없이 우리는 따스하고 평화로운 주말을 보냈다.
“자기야, 연말에는 이별을 마음에 달고 살았는데, 요즘 내가 완전 착해진 건가?”
“처음엔 네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잖아. 뭘 해도 그냥 행복해하고, 기대를 하면서 섭섭해하고 그랬던 거지.”
“아, 맞다! 나 진짜 자기가 날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냥 행복했어.
그러다 점점 욕심이 과해진 거지. 날 사랑하는 데 이건 당연히 해야지 하면서.”
“세상엔 당연한 건 없어. “
그는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내 옆에 있었다. 나만 사랑을 쏟고 있다고 질타하고 억울해했다. ‘사랑했다, 미워했다’를 반복했다. 눈만 가리면 아무것도 못 보는 꿩처럼 나는 또 망각했다. 슬그머니 기대가 올라왔다.
때마침, 바깥세상도 불가항력인 코로나 사태로 어수선하고 불안해져 갔다. 프리랜서로 갤러리에서 도슨트 하는 나에게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그도 아트페어와 여러 기획전을 다시 매니징 하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모처럼 맞이한 평온함이 출렁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요즘 시즌이라며 그는 싱싱한 갑 오징어로 샤브샤브를 해주었다. 보통 거실에서 TV를 보면서 식사를 하였다. 뉴스나 영화, 드라마, 쇼 등 그때마다 등장하는 이슈가 대화를 이루었다. 나는 우리를 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 늘 아쉬웠다.
즉석요리 덕에 인덕션이 설치된 식탁에서 먹을 수 있었다. 샤브샤브가 새롭고 맛있지만 무엇보다 먹는 장소가 옮겨지는 바람에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갑 오징어의 부드러운 식감과 미나리 향을 음미하며 낭만적인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다니. 찬찬히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와인 한 병을 다 마실 즈음, 점점 우리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그의 속마음에 깊이 다가갈수록,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왔다.
“(만나면서) 널 계속 보고 있어.”
“어? 뭐라고? 아직도 날 보고 있다고? 뭘 더 봐? 나 뻔하지 않아? 뭘 더 본다는 거야?”
“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건 안보잖아.
나중에, 이런 면이 있었어? 하며 누군가는 실망하고 헤어지기도 하지.
난 그래서 계속 보고 있어.”
그의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왔다. 지금까지는 괜찮으니 계속 날 만났지… 하지만 아직 딱히 결혼할 마음이 들만큼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아직도 나를 관찰하고 있나?
며칠이 지나도 그 날의 대화가 계속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지인의 모친상으로 강남에 있는 성모병원 장례식에 잠깐 들렸다고 했다. 문자를 보자마자 거리가 가까우니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고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주고받은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늦은 시간이라도 달려가려 한 것이다. 그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담에 보자고 전화를 끊었다. 아, 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자기에는 너무나 숨이 막혔다.
“통화 후, 마음이 아팠어.
‘결혼’이 중요한 문제이고 고려해야 하는 점에 동의해요.
하지만 당신의 행동을 보니 결혼할 여자인지 아닌 지 고려 후, 사랑을 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거 난 이해가 안 가요.
난 이대로 사랑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진다고 여기거든.
연애를 마냥 즐겁고 신나게 하고 싶은데,
당신은 이것저것 다 본다는 것이 순수하게 안 느껴져요.
그냥 어찌할 수 없는 이 뜨거운 감정에 그냥 빠져보면 안 되나?
우리의 이 솔직한 감정 말고도 뭐가 더 있어야 하는 걸까?
나에게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 게 있는지 말해줄래요?”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하네”
라며 그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순간,
“그런가?”
심각함이 바로 마음에서 사라졌다. 숨 막혀 못 잘 것만 같았는데… 그의 말을 듣고 바로 잠이 들 수 있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