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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Jan 26. 2021

사탕상자

어느 순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걸 경험한다. 관대함이 퍼진다.  하늘에 닿는...  경이로움이랄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 관계도 안정을 찾으며, 나는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질문할 때, 듣고 싶은 말을 듣고자 물어본다는 것. 이때 상대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자신이 만든 프레임에 기준을 두고 확인하기 위한 질문일 뿐,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뿐더러 싸움만 하자는 교묘한 속임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질문하기 전, 자신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 세 가지.

첫째, 질문을 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둘째, 질문을 들은 상대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질문이 서로를 위한 것인가?



‘밸런타인데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그는 예전 회사 동료와 약속을 잡았다.


“연인을 위한 날인데… 날 봐야지, 안 그래?”  


그는 별 대꾸 없이 다른 날로 약속을 옮겼다. 이번에도 선물과 이벤트는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아침에 시작된 콧노래가 하루 종일 흘러나왔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로 이벤트를 즐기지 않는 그가 그냥 재미있고 귀엽게 여겨졌다.


밸런타인데이를 함께 보낸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을 주면 좋아할까? 선물을 통해 사랑을 전하는 게 무척이나 설렜다. 평소에 즐겨 입는 조끼가 낡고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려, 카키색 얇은 오리털 패딩 조끼를 샀다. 또 고급스럽고 소담스러운 케이크를 사러 백화점에도 다녀왔다.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 두 손 가득 짐을 든 채, 쇼핑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신나게 쏟아 냈다. 이벤트가 싫다던 그는 케이크를 혼자 다 먹어 치웠다. 또 패딩 조끼가 마음에 든다며, 삼월이 지나도록 그 조끼만 입었다. 이 모든 것에 난 그저 흐뭇하고 만족스러웠다.


한 달 후, 화이트데이 전날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평소와 같이 와인을 마시며 늦게까지 영화를 보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 별 기대 없이 뭘 먹을까 하며, 침실에서 나왔다. TV를 보며 소파에 앉아 있는 그가 뭔가를 물끄러미 건네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다. 화이트 데이라고 사탕 상자를 선물한 게 아닌가!!!


“아니 어젯밤에 왜 얘기 안 했어? 여전히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지.”


“화이트 데이는 오늘이잖아. 그니까 오늘 주는 거지.”


주고받는 대화가 뭔 말인지,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화이트 데이에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한테 하는 선물을 그가 나한테도 한 것이었다. 너무나 기쁘고 감동한 나머지 세수도 안 한 꼬질꼬질한 모습이지만 그 순간을 동영상에 담았다.


그는 사탕과 함께 무엇을 선물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샀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바보 아냐? 책도 있고, 꽃다발도 있고, 머리핀, 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옷, 스카프, 가방, 화장품, 향수, 등 말하려면 입이 아플 정도인데! 모든 여자가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한다고! 뭘 사야 할지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었지, 혼자 고민하고, 결국 안 샀대. 아이고야, 귀여워서 또 그만 웃고 말았다.


“돈과 시간은 사랑이다. 돈과 시간은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라고,


나는 미신처럼 굳게 믿고 있었다. 나에게 돈을 잘 쓰거나,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는 사람은 날 사랑하는 거였다. 또한 나에게 인색한 사람은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에도 특별한 날에도 선물하거나 사랑 표현을 자주 하지 않았다. 연락도 시간 내는 것도 인색했다. 언젠가 그의 여자라는 확신이 들 때, 아낌없이 돈도 쓰고 선물도 하겠지. 스케줄을 변경하면서 함께 지내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겠지… 기다려야지 뭐 별 수 있나.


언젠가 그는,


“여자한테 환심 사는 건 쉬워. 여자가 원하는 선물 사주고, 여행 가고, 좋은데 데려가고…”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왜 그 얘기를 나에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선물 받고 싶고, 그와 여행 가고 싶고, 좋은 데서 데이트하고 싶은 게 설마 속물로 보여서? 선물을 원하고, 여행 또한 충족시켜 주는 남자를 목적으로 만난다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선물을 받고 싶고, 여행을 함께 하고, 다양한 곳에서 데이트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내 생각이 천박한 건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 연말에 우울했는지. 밸런타인데이는 신났고, 화이트 데이는 기뻐했는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보이는 사랑을 위해서? 라면 돈을 쓸 필요가 없다.”


나는 무엇보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선물을 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화이트 데이에 사탕을 받은 것이, 내가 샤넬 핸드백을 사는 것보다 행복했다. 선물이 사랑을 표현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 데이를 겪으면서, 그의 말과 행동, 선물 조차에서도 사랑을 확인하려 애쓴 나를 보았다. 그럼에도 상관없이 그저 주는 것에 충만과 기쁨을 느낀 나를 만났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온전히 이해가 되었다. 아, 전율이 온몸을 타고 돌아 두 눈을 통해 흘렀다. 시간은 멈췄다. 모든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이로운 순간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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