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원 Jan 22. 2021

그의 전 여자 친구

이토록 경이로울 수가! 진홍빛 구름과 불바다... 해돋이, 장엄한 의식이 시작되었다.


구정 연휴, 북한산 원효봉에 올랐다. 그는 정상에서 중요한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음력설 첫날에? 중요한 일이라고? 행여나 청혼이라도 하는 걸까?


열네 살, 북한산 등반 이후 34년 만이었다. 지독하게 고생한 기억에 북한산 산행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긴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 그와 함께라면 뭐든 할 거야! 백두산도 갈 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돌계단을 헉헉대며 기어올랐다. 잔뜩 품은 기대 때문인지, 힘들다기보다는 언제 다다르나 생각 밖엔 없었다. 드디어 돌계단이 끝나자 장갑 없이는 도저히 오르기 힘든, 경사 80도에 육박한 돌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험난한 길을 그와 함께 도전한다는 게 오히려 설렜다. 암벽 능선을 로프에 의지하며 조심스레 한 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산 꼭대기에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한다는 걸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가 까마득했다.


봉우리에 올랐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내 품에 안기기도 전, 길 고양이 무리가 눈을 끌었다. 대충 스무 마리는 넘을 성싶었다. 이리도 높은 곳에 이리도 많은 길냥이가 있다니! 어떻게 알고 준비했을까? 그는 사료와 물을 여러 군데 놓았다. 세심하기도 하지... 순식간에 더 많은 고양이가 모여들었다. 세상에,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새끼 고양이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파이어와 에머럴드 빛깔의 눈을 가진 ‘오드아이’였다. 신비로운 아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까?


사방이 탁 트여서인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제자리걸음으로 360도 천천히 돌면서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에 도취되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구나. 하늘 아래 바로 우리가 있다니! 바야흐로 적시에 이르렀다. 아, 꿈꾸던 일이 여기에 지금 일어나는 건가?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더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새해 첫날, 산 정상에서 중요한 일이??? 그는 간단히 말했다.


“아까 다 했잖아. 고양이한테 밥이랑 물 준거.”


의상능선, 북한 산성길, 모두 빼어난 절경이었다. 낮은 담장인 여장도 아름다웠다. 빛바랜 단청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졌다! 크리스마스와 십이월의 마지막 날 밤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인데.


허탈감에 주저앉고 싶었다.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한마음으로 함께하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안타까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애처로운 길 고양이에게 나도 그처럼 진심을 다했을 텐데.


달콤한 프러포즈를 상상하며 한 발 한 발 무서움을 이겨낸 내가 왜 부끄러운 건지 속이 상했다. 그를 어떻게 대할지, 머리도 마음도 텅 비워졌다. 아, 나도 욕심과 기대 때문에 이러는 거 안다고!!!


내면에 자리한 생각, 감정, 욕망을 제때 제대로 풀지 못하면 고달파진다. 삶이 답답해진다. 나는 어떻게 표현할지 여전히 몰랐다. 먹먹한 채로 나흘이나 더 그의 집에서 지냈다.


닷새나 비운 집에 들어서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오히려 다행한 일인지도 몰랐다. 발 디딜 틈 없이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를 치웠다. 쓰러질 듯 쌓여있는 설거지도 끝냈다. 화장실 청소도 하면서 우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을 애써 지우려 하였다. 타일을 빡빡 문지르면서 물과 함께 찹찹한 기분도 씻겨 내려가기를... 그동안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논 아들을 향한 짜증은 말끔히 가셨다. 과연 그와 결혼하면 행복할까, 고민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사랑을 수치화해서 100이라면 아내를 향한 사랑이 100이야. 아내와 여자 친구는 다른 거 같아.”


그의 아내가 되어야만 사랑받는 느낌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게, 사실 와 닿지 않았다. 연애에서 가슴 벅찬 생동감을 느끼지 않고서 어떻게 결혼을 결정한다는 거지? 이미 100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일부만을 쓴다는 걸까? 다 쏟아부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물론 소중한 아내를 위해 사랑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겠다. 아내만을 사랑하려는 순순한 뜻이 어렴풋이 그려지긴 한다. 하지만 내가 그의 아내가 될지 안 될지 그도 나도 모르는 데, 가슴 뛰는 사랑은 언제 경험하는 걸까?


어찌 됐던 누가 옳고, 그른 건 아니었다. 너무나 달라서 도전이 되는 나를 지금까지 계속 만나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까다로운 그와의 관계가 불안하면서도 큰 이슈나 갈등 없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또 겨울도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피앙세이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에 아랑곳없이 그는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다가오다가도 멀어지고, 멀어지다가도 옆에 있는 그를 보면 여간 헷갈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그에게 내가 빙빙 돈 것은 아니었을까? 뭐가 더 맞는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더 가까이 가고 싶어도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곧 다가올 밸런타인 데이를 앞두고, 마지막이길 빌면서 다짐한 것이 있었다. 아무 의미가 없지만,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그와 그의 전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쩌다 무심코 던진 그들의 지난 이야기에 의구심이 들었고, 그때마다 드라마를 썼다. ‘전 여자 친구를 잊기 위해 날 대처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꽂혔다. 재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그녀가 누굴까, 상상도 하면서 말이다. 그도 긴 결혼생활을 접고, 이혼 후 첫 만남이었으니, 얼마나 신선하고 강렬했을까? 깊고 오랜 만큼 이별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을 터. 하지만 그들이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타이밍에 내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때부터 그와 함께 있으면서 왜 내가 그토록 외로웠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복잡한 생각과 감정으로 우리에게 몰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이혼 후, 처음 겪었던 연애와 이별을 떠올렸다.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 대상이 필요했다. 충분히 좋아하지도 않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만났다. 그때 그 남자와 있을 때는 평화로웠다. 기대나 관심이 없어서 그랬다. 그저  산란한 마음을 비우고 싶을 뿐이었다.


맞닿은 현실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 오해와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못하는 드라마는 끝내자!’”


한 두어 달 이상 고민하던 이슈에 끝이 와서 기뻤다. 나는 선택했다. 그러자 용기가 났다. 전 여자 친구와 완전히 끝났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말했다. 차분한 눈빛과 부드럽지만 또렷한 목소리에서 아무것도 남김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에 위치하고 있던 고약한 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생각 속에 머물고 있는 상념은 절대로 이로운 것이 아니었다. 에고였으며 항쟁일 뿐이었다.

이전 09화 인색한 남자 & 섭섭해하는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