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원 Jan 18. 2021

인색한 남자 & 섭섭해하는 여자

그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날 반겨준 소품... 분위기만이라도...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올해, 가장 뜻깊은 성탄절을 보내리라 믿었는데...  아직도 사랑에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는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심각해 보였다. 나 혼자 들떠 케이크와 선물을 마련했다. 로맨틱한 시간을 고대한 나는... 그만 멍했다.


그는 성탄절과 연말에 의미를 두지 말자 했다. 평소에 행복하자고, 어떤 기대도 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말하는 행복이 뭐였을까? 내가 옆에만 있어도 행복한 걸까? 특별한 기념일에 더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는 낭만을 정말 모르는 걸까?


제야 보신각종이 울렸다. 카운트다운에 맞춰 손뼉 치며 “해피 뉴 이어” 외쳤다. 이 순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으레 키스와 포옹을 하였다. 각별하고 애틋한 사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나의 바람이 욕심이었던 걸까?


“지난해 가장 특별한 게 뭐였어?”


“생각 안 해봤는데.”


어쩜, 날 만나 사귀게 됐는데, 할 말이 없다고? 아… 지친다. 그는 정말 너무 인색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일월 초, 곧 다가올 그의 생일까지는 최선을 다해 잘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무슨 까닭인지, 심연에 빠진 그를 설득하고 싶지 않다. 우리 관계, 연애에 멈춰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사랑을 택하지 않는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할 것이다. 애써야 하는 건 선택조차 하지 않으리. 억지로 되는 건 어차피 결국 포기하게 될 테니까.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마음 한편에 묻어둔 섭섭함이 불현듯 떠올랐다.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연인인 나에게 그는 문자도 무음으로 설정했다. 본인이 원할 때만 확인하는 태도에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날 유일한 존재로 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서운함을 넘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차이를 인정하고 기대를 안 하려 해도 이렇게 밖에 대할 수 없는 건가?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그의 생일을 보내고 열흘이 더 지나서야 오랜만에 우리는 만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별일 없던 것처럼 밝게 그를 대했다. 서먹한 시간과 멀어진 공간만큼이나 허전하고 외로웠다.


일월이 지나서도 그의 뜻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 사이가 비밀이어야 한다는 생각. 왜 숨기고 싶은 걸까?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이 그에게는 아니었나?  


나는 '키아프 아트 서울'에서 만나 친해진 큐레이터에게 우리 관계를 털어놓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우리끼리 충분히 좋은데, 굳이 여러 사람에게 티 내고 싶지 않다고. 밝힘으로써 남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고, 무엇을 얻기 위해서인지 들여다보라고 했다. 여러 여성의 선망인 대상, “당신이 나의 애인이라는 게 쾌감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동시에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멋쩍게 웃고 있는 나를 안았다. 새초롬히 서있는 십 대 소녀를 다루듯, 나의 이마에 덮인 머리카락을 넘기며 내 눈을 천천히 응시했다. 말똥말똥 쳐다보는 나에게 그는 조용히 미소만 뗬다. 이내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조금도 실망하지 않은 그를 느끼며…


그의 여자 친구가 나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있었다. 정말 우리 관계에 내 고집은 조금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로 날 위해 비밀로 하자고 한 걸까?


“우리는 누군가를 위한 것처럼 말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상대를 위한 게 아닌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그 누군가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주가 지났다. 나는 같은 이슈에 꽂혔다. 더 깊은 대화를 원했지만 그는 따져 묻는 걸로 들었다. 추궁한다고 거북해했다. 더 이상 질문은 위험했다. 난 입을 다물었다. 전 여자 친구를 염두에 두고 비밀연애를 함구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건 사실이든 아니든 무의미했다.

 

나는 다시 생각에 빠져 들었다. 불현듯 우리가 특히 내가 가십거리가 되고, 주목받게 되어, 필요치 않는 불편함에서 보호하고 싶은 게 아닐까? 아, 그의 본심이 이거였구나!


다른 여자의 관심을 끊게 하고, 나만 바라보게 하려는 소유욕. 노파심에서 비롯된 얄팍한 질투. 세상에, 사려 깊은 그에 비해 어찌 그리 가벼울까? 아, 나도 이런 내가 정말 지긋지긋하다. 언제까지 미친년 널뛰기만 할 것인가?


그럼에도 푸념을 하면 뭘 하나.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로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아무리 그가 다정한들 공허한 마음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 같았다.

 

“국제 옥션 기획전을 끝내고 나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거라고 여겼어요.

예전 연애스타일을 물어본 적 있었죠.

다분히 열정적으로 그려졌어요.

또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해주고 싶고 많이 사랑하고 싶다는 그 말에,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싶었죠.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당신이 아직 사랑할 때가 안된 건가?

아님 열정적인 행동이 나오게 할 만큼 내가 매력적이지 않은 건가?

이런 생각 자체가 뭔가 잘 굴러가지 않다는 건데,

난 나의 온전한 사랑을 주고 싶은,

날 많이 사랑하는 남자를 나도 만나고 싶어요. 그게 다예요.”


“말해줘서 고마워.

나의 어떤 행동이 너에게 사랑을 충분히 느끼거나 그렇지 않은지, 나도 깊이 생각해 볼게.”

 

우리 갈등은 좀 더 자주, 더욱더 밀도 있는 만남을 원하는 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만날 수 있음 만나고 아니면 아닌 대로 괜찮은 그. 다름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만나 서로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모름지기 섭섭함과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이끌림이 위태로운 사랑을 여기까지 끌고 온 미스터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떨어져 있을 때나 종종 함께 있을 때, 알 수 없는 갈증이 올라왔다. 목마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마음속, 머릿속 죄다 뿌연 안개처럼 답답했다. 지치고 힘들지만, 이별이 더 두려웠다. 덧없이 이월로 접어들었다. 홀로 고독했던 지독한 풍경이 느릿느릿 지나갔다.  

이전 08화 반갑지 않은 출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