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원 Jan 31. 2021

사랑을 위한 목록

감태에 일본식 간을 한 초밥을 얹고 김치쪼가리 하나만 넣고 싸 먹어도 맛있었다.


그는 요즘 코로나로 밖에서 점심을 사 먹지 않고 도시락을 시켜 먹는다고 하였다. '도시락이라고? 내 남자를 위해 도시락을 싸줄까?'기특한 생각이 들자마자 반찬을 만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분홍색 진주 햄을 달걀에 묻혀 부쳤다. 어묵볶음, 멸치볶음, 오징어채 볶음, 우엉조림, 연근조림도 만들었다. 평소에 그가 요리를 하고 난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반찬을 쉽고 빠르게 완성하는 걸 그는 신기해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해.”

 

그는 맛있다며, 도시락용으로 만든 음식을 주말 내내 먹었다. 다음 날 월요일 아침, 도시락 잘 싸갔는지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다. 짐이 많아서 그냥 출근했다고 답이 왔다.


‘아, 이럴 수가! 도시락 없이 갔다고?’


한 시간 반 동안 부랴부랴 새로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쌌다. 곧바로 그의 회사로 날아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 10분, 다행히 점심시간 전에 도착했다. 도시락만 급히 전해주고는 한 시간 반 걸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 조심해서 가. 너무 고맙고 잘 먹을게. 앞으로는 미리 물어봐 줘.”

 

고마운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문자가 와 있었다.

 

“잘 도착했어요. 자기가 도시락 사 먹는다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갔어요. 담부턴 미리 물어볼게. 혹시 언짢아요?”

 

“미안해서 그렇지. 급하게 준비해서 오느라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무튼 맛있게 잘 먹었어.”

 

“맛있게 잘 먹었음 됐어요!!!”


그 후, 우리는 밖에서 도시락 먹는 재미에 들렸다. 주로 분당 우리 동네 탄천 넓은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하였다. 평소 탄천을 따라 산책하면서, 오순도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돗자리 깔고 음식을 나눠 먹는 다른 가족이 난 늘 부러웠다.


오래 간직해온 소망이 어느새 내 앞에 펼쳐졌다. 너무 기뻤고, 꿈을 이루게 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다음 만남에 접이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와 나를 감동시켰다. 첫 소풍을 한 그 날, 바로 하나 둘 장만해 놓고 짠, 하고 꺼내 놓은 거였다. 아, 세심한 남자 같으니라고!


우리는 원 터치 텐트에서 낮잠도 잤다. 편안한 주말 오후를 야외에서 보내다니, 꿈만 같았다. 감태에 일본식 간을 한 초밥을 얹고 스팸 하나만 넣고 싸 먹어도 맛있었다. 그는 핸드폰에 저장된 K-pop을 틀었다. 아이유의 고운 소리가 감미롭게 들렸다. 난 와인을 마시며 뜨개질을 하였다. 그는 잔디밭에서 공놀이 하는 여러 아이와 탄 천을 걷는 사람들을 보며 와인을 마셨다.


그는 와인을 종이컵으로 마시는 게 영 분위기가 안 난다며 특별히 야외용 컵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니 뜨거운 뱅쇼도 만들어 와야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코로나가 더 기승을 부렸다. 탄천에서 텐트 치는 것에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더 이상 우리는 피크닉을 하지 않았다.


말이 점점 줄고, 안 하던 핸드폰 게임을 하는 그를 보며, 난 질문이 많아졌다. 그는 핸드폰 게임을 해 왔다며 그동안 내가 몰랐던 거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내 질문을 불편해하는 게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드라마를 봤다. 운동 좀 하다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별 다를 게 없는 주말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샤워하면서 문득 깨달은 게 있다고 했다. ‘질문하지 말라’고 한 것이 자기만의 ‘내세움인걸 알게 되었다’며, 뭐든 물어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고 싶은 오만 가지 질문이 그만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신기했다. 그날 저녁 메모에 난 이렇게 썼다.


“노력하려 하지 않고, 그냥 멈출게. 정 그게 힘들다면, 미뤄볼게.

미뤄놨던 화, 염려, 의심 다시 꺼내보니 별거 없는 걸 알고 배시시 웃겠지.

질문이 불편한 내 남자 친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물어봐. 관대하게 말했지.

샤워를 마치고 완전 섹시한 모습으로 말이야. 내 남자 친구는 이리도 멋진걸.

확인하고자 질문하는 습관, 그만 삼킨다. 그리고는 가볍게 웃는다.

찬란한 봄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고, 이렇게 근사한 남자 친구도 내 옆에 있는걸.”

 

그와 잘 지내기 위해서 <사랑을 위한 목록>을 만들었다. 데이트하기 전, 작성한 목록을 읽고 그를 만나면 효과적이지만 자주 잊었다.

 

1. 일이 가장 중요하다. 일로 바쁜 그를 존중할 것.

2. 공인의 내조자로서 존재할 것. 사회와 예술문화에 헌신할 때, 그는 가장 살아있다.

3. 쉬고, 충전할 시간과 공간을 선물하라. 그래야 그는 숨을 쉰다

4. 그가 날 위해 뭔가 해줄 것을 바라지 말고, 그가 좋아하는 걸 그냥 한다.

 

1번 난 바쁘지 않았다.

2번 난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3번 나그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충전되는 시간에 반해, 그는 사회와 연결될 때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4번 그를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를 내버려 둬야 했다.


아, 행복하려고 연애란 하는 건데,  도 닦으 말인가? 어긋난 성향에도 조화가 가능할까?


나는 그에게 필요조건일까, 충분조건일까? 필요는 결핍에서 오는 걸 테고, 충분은 욕구의 다른 의미일 텐데…. 그의 결핍을 알 수 없으니, 무엇이 필요한알 길이 없었다. 필요를 채운들, 그야말로 욕구에 불충분하다면?


얽히고설킨 상념에 진이 다 빠졌다.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그와는 달리 오로지 감정에 의지해서 행동하는 나로서는 어찌해야 하나. 조건이고 뭐고 맞춰보는 걸로.


1번 바빠지기로 했다. 돈을 벌든지, 자기 계발을 하든지.

2번 사회에 기여하고 헌신하는 기회를 가져보기로 하였다. 벌써 생기가, 열정이 차오른다.

3번 일상이 바쁘게 돌아간다면, 웰빙을 위해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

4번 우리 사이에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춤추도록 거리를 둔다.


주먹을 펴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애살스럽게 꼭 쥐고 있어야만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부담스러운 밀착과 뜨거운 온도를 버거워한 것일 게다. 관점을 바꿨을 뿐인데 세상이 이리 달라 보이다니! 간절해서인가? ‘돈오’의 순간이 내게도 오다니. 땅의 중력에서 벗어나 마치 비상하는 것만 같았다. 구속과 의무가 아닌, 의지와 의욕이 샘솟았다.


그저 편안하고 따스한 바람이 우리 사이에 흐를 수 있도록. 우리의 다름이 다채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기를!

이전 12화 북 치고 장구치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