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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Feb 11. 2021

착각 & 환상

처음 이태원에서 만난 그날, 택시 안에서 내 손을 어루만지지만 않았어도, 나는 시작 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서로 다른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을 끌어내고 싶었다. 그래야 그의 진정성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관계를 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는 함구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나는 성가신 마음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침묵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말의 무언가가 멀어져 갔다.


한 순간에서 다음, 그저 순간을 살아갈 뿐. 매번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싶었다. 그러다 부신이 아드레날린을 퍼붓고, 근육이 자극되는 걸 상상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신경이 곤두서고,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타고 온 몸에 내뿜어졌다. 살기 위해 나는 발버둥 치고 있었구나.


“언제가 하겠다고 말한 약속. 우리 하는 거 맞아요?”


“언젠가는 하겠지. 지금이 아닐 뿐.”


“그럼 언제요?”


“그건 나도 몰라. 분명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


“맙소사. 난 지금 당장 그걸 원한다고요!!!!

차라리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당신의 말과 행동과 눈빛, 그 모든 것은 날 무시하고 있어!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해?

당신의 침묵에 숨 막혀 죽을 지경이라고!


내가 악쓰는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깼다. 미쳐가는 건가? 꿈에서까지 대화가 반복되다니…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숨을 들이켜는 순간, 엄청 난 고통이 명치끝에서부터 밀려왔다. 아... 하고 나도 모르게 몸이 웅크려졌다. 주먹 쥔 손가락 마디 끝으로 천천히 아픈 곳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기억의 저편, 인식한 감각이 부끄러워 감춘 걸까? 기억은 은폐되고 억압돼 있다. 하지만 자국처럼 남아있다. 어떤 모양으로든 정체를 드러낸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기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알아채기 어렵다.


퇴근하면서 또 보기로 한 어느 날,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날 아침, 깜빡하고 그의 집에 지갑을 놓고 나왔다. 카드도 현금도 없이 돌아다니기가 영 편치 않았다. 그의 아파트 앞 카페에 약속한 시간보다 세 시간 먼저 도착했다. 나는 커피값을 어떻게 지불할지 고민만 하다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갑이 없어 쩔쩔맨 상황을 그는 아침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신경 썼다면 커피 쿠폰을 이미 보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기억은 기억을 불러왔다. 어느 날 신사동 바에서 우리는 스파클링 와인을 마셨다. 새벽 1시가 넘었다. 카카오 택시는 잡아주면서 결제하지 않은 그날도. 알아차렸어야 했다. 곧 명절이 시작되었다. 긴 연휴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던 그때도… 진즉 알아차렸어야지!


아직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사랑하게 되면 날 위해 커피 쿠폰을 보내줄 거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사랑하게 되면 편하게 가라고 택시비도 내줄 거야. 사랑하게 되면 연휴엔 나랑 시간을 보낼 거야. 사랑하게 되면….


나에게 호감이 없었다면 퇴촌 한증막에 가자고 했을까? 처음 이태원에서 만난 그날 택시 안에서 내 손을 어루만지지만 않았어도. 첫 연락에 두근거리고, 복잡한 감정이 올라온다는 그 멘트 또한 없었다면! 나는 시작 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나 스스로 상처 받은 것이었다! 나만의 착각이든 환상이든.


목소리와 말투가 듣기 좋아,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의 모든 얘기가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는 언젠가 나랑 사귀게 되면… 하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투게 되면, 자정 전에 무조건 사과하고 완결 짓겠다고. 그래서 남겨짐 없이 잠들게 할 거라고.


“내가 잘못한 건데도?”


“응. 그래도 내가 무조건 사과할 거야.”


난 울었다. 따뜻하고 온전한 사람을 이제야 만난 거구나! 나의 상처가 이 사람을 통해 치유될 것만 같았다. 사귀는 사이가 언제 되는 걸까? 아직 아프기도 전인데 뭔가 스르르 눈 녹듯 평온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남겨진 기억은 어떻게든 다시 그때를 돌아보게 하였다. 기억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사실과는 무관한, 그저 이야기로 남겨두고 싶은 나의 에고의 세계였다. 그는 그의 언어로 말했을 뿐. 그의 달콤한 말에 의미를 부여한 건 나였다. 그래야 한다는 프레임마저 가졌다. 나는 기억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흘러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과 함께…


우리는 언제 사귀는 사이가 되는 걸까? 완결되지 않은 대화는 자정을 넘겼고, 남겨진 감정은 켜켜이 쌓였다. 사랑하게 돼야 섹스를 한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사귀는 것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연애는 나만의 착각으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 달라질 거란 환상. 언젠가는 없다. 분열과 혼란, 충돌과 상처. 일루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무겁고 예민해져 갔다. 나는 덫에 걸린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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