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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리 Oct 27. 2022

아빠의 담배 심부름 가던 밤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적 흡연자였다. 아빠는 종종 나와 언니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아빠가 담배 사 오라면 나는 아파트 단지의 언덕배기 꼭대기에 있는 슈퍼에 가서 담배를 사 오곤 했다.



지금은 어린이한테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상상이 안되지만, 그때만 해도 어린 자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집이 많았다. 그래서 어린 내가 담배를 사 간다고 해도 아무도 말리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저 꼬깔콘 하나 계산하듯이 손쉽게 담배 한 보루쯤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 번 심부름 갈 때마다 아빠가 피우던 디스 한 보루씩을 사 왔다. 한 갑이 아닌 한 보루를 사 온다는 점에서 아빠가 담배 꽤나 피우던 흡연자였음이 추측된다. 아마 하루에 한 갑은 피지 않았을까.



어느 날 밤, 아빠가 언니와 나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어두컴컴한 동네가 생각나는 것을 보아 밤 9시 무렵이었던 것 같고, 나는 일곱 살 즈음, 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열 살도 안 된 어린이 두 명만 밤에 외출시킨다는 것이 지금 상식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언니와 나는 어두컴컴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 언덕배기를 올라 아파트 단지 꼭대기에 위치한 슈퍼에 다다랐다. 그 슈퍼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였다. 슈퍼에 들러서 디스 한 보루를 사는 것까지 성공. 이제 집으로 무사히 귀가만 하면 되는데...



나와 언니는 심부름을 마친 홀가분한 마음에 언덕배기를 총총총 뛰듯이 걸어내려 갔다. 어두컴컴한 언덕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인적은 드물었다. 주황빛 가로등만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 앞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코로 확 꽂히는 알코올 냄새. 술 취한 아저씨가 비틀대며 혀 꼬인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아저씨 따라서 아저씨 집에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나쁜 사람이 '나 나쁜 사람이오.' 하는 것 봤나. 어린 나는 그 자리에 얼어서 꼼짝도 못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이후 상황은 정신없이 울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보다 앞서 걷고 있던 언니가 내 손목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아저씨는 나에게 말건 것 이외에 우리 자매에게 위협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는 집에 도착해서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담배 심부름 갔다가 울면서 돌아오니 아빠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눈물 콧물 범벅되어 울면서 겨우 말했다. "무서운 아저씨를 만났어. 아저씨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어." 7살이었음에도 내가 유괴를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지금 돌이켜봐도 너무 무섭다. 그날 밤, 언니 없이 혼자 밤에 담배 심부름을 갔으면 어찌 되었을까. 언니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이 함정이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정신 차리고 나를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채 열 살도 안 된 언니였다. 그날 이후 아빠는 다시는 언니와 나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아빠에게도 어린아이들에게 밤에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리라.



나는 그 후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어느 날 학교에서 흡연의 유해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학급에 있던 텔레비전으로 담배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이 충격적이었다. 우리 아빠의 세상 친한 친구인 담배가 저런 악마 같은 물건이었다니. 나는 그 이후로 아빠에게 담배를 끊으라는 잔소리를 시작했다. "아빠가 끊지 않으면 내가 필 거야."라며 호기까지 부렸다. 그러자 아빠는 한 번에 담배를 끊었다. 엄마는 마누라가 잔소리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막내딸이 잔소리하니깐 바로 먹힌다고 샐쭉거렸다. 외할아버지는 평생 담배를 피우셨는데, 엄마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담배를 한 번에 끊는 사람이 진짜 독한 인간이야. 신서방이 못 끊어도 니가 이해해라."라고 했단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하루에 한 갑 피던 골초를 단박에 금연하는 독한 인간으로 갱생시켰다.



아빠의 금연은 은단과 함께였다. 아빠가 담배 생각이 날 때면 은단을 찾았고, 나는 잽싸게 집에 있던 은단을 집어 아빠에게 건넸다. 그렇다. 아빠의 금연으로 우리 집에선 담배 심부름 대신 은단 심부름이 생겼다. 어린 나는 은단 심부름만큼은 기쁜 마음으로 했다. 아빠의 금연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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