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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리 Oct 28. 2022

우리 동 경비아저씨에 대한 기억

아파트 생활에도 정(情)이 있었던 때

어릴 적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동마다 경비 아저씨가 있었다. 각 동의 출입문 바로 옆에 조그마한 경비실이 있었다. 출입문 바로 옆에 위치해서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경비실을 마주치는 구조였다. 요즘은 경비실이 독채로 존재하고 한 경비아저씨가 두 개의 동 정도를 관리하는 구조가 흔하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아파트는 옛날 아파트였기에 동마다 경비실 칸이 설계되어 지어졌다.



이렇게 동마다 경비실이 붙어 있는 구조였기에 경비아저씨와 동 주민들과의 관계는 매우 끈끈했다. 또 그 시절의 '정'의 문화로 더욱 경비아저씨와 주민들이 가까이 지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집에 선물로 먹을거리가 들어오면 꼭 경비실에 갖다 드리곤 했다. 할머니는 같은 동에 사는 할머니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경비실 앞 벤치에서 경비아저씨와 할머니들의 수다의 장이 열리곤 했다. 할머니는 경비아저씨께 인사를 잘하라고 말했고, 나는 집을 나설 때에도 집에 들어올 때에도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경비아저씨는 웃는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그래. 학교 갔다 왔니?"



내가 초등학생 시절 열쇠 구멍에 끈을 달아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도어락이란 것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모두 집 열쇠를 관리하면서 살았다. 나는 내 친구들처럼 목에 열쇠를 걸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경비실에서 호수마다 열쇠를 맡아줬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시장에 가면서 열쇠를 경비실에 맡기고 외출하면, 내가 그 열쇠를 경비실에서 찾아서 빈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세대가 경비아저씨에게 열쇠를 맡겼기 때문에 경비아저씨는 자연히 각 호수의 세대 구성을 잘 알 수밖에 없었으리라. 내가 가면 호수를 말하지 않아도 우리 집 열쇠를 척하고 꺼내 주시곤 했다.



그런데 경비실에 우리 집 열쇠를 맡긴다는 것이 지금 생각으로는 '뜨악' 할 일이다. 아무리 경비아저씨라고 해도 남이고, 나쁜 마음을 먹으면 우리 집 열쇠로 우리 집에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1990년대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비아저씨를 믿고 열쇠를 맡겼다. 그 아파트에 10년 이상 거주하며 열쇠를 맡기는 일로 인한 불상사는 들어보지 못했다. 10년 동안 많은 경비아저씨들이 거쳐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동을 거쳐간 경비아저씨들 중 나쁜 마음을 먹은 분이 없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경비실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흰 눈이 동네를 뒤덮은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고, 언니랑 나는 좋아하는 분식집에서 라볶이 하나를 포장해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엄마가 열쇠를 안 맡겨놓고 외출한 것이 아닌가? 나랑 언니는 추운 겨울 손에는 라볶이 포장한 봉지를 든 채,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경비아저씨는 우리가 우왕좌왕대는 것을 보고, 경비실 한 켠을 내주었다. 그렇게 경비실에서 언니와 라볶이를 먹은 기억이 난다. 경비실은 매우 비좁았고, 언니는 경비아저씨 의자에, 나는 보조의자에 앉아서 흰 눈이 내린 동네를 바라보며 김이 폴폴 나는 라볶이를 먹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아파트의 각 동 공동현관에는 계단도 있고, 자전거나 유모차를 끌어올릴 수 있는 언덕길도 있다. 7살이었던 나는 집에 놀러 온 친척 오빠와 언니와 함께 공동현관의 언덕길 난간에서 놀고 있었다. 난간을 붙잡고 놀다가 내가 순간 뒤쪽 화단으로 휙 넘어가며 떨어졌다. 나는 자지러지게 울었고, 내 또래인 친척오빠와 언니도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결국 경비아저씨가 얼른 집에 올라가 엄마를 불러왔다. 엄마에게 내가 어쩌다 다쳤는지를 설명한 것도 경비아저씨였다. 엄마는 나를 얼른 병원에 데리고 갔고, 깁스를 한 채로 귀가했다. 그 이후 2개월 간 깁스를 풀지 못할 만큼 팔을 다쳤다.



199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나는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때와 지금 아파트의 생활상은 많이 다르다. 어릴 적 앞집 할머니네에도 자주 놀러 가서 두유를 얻어먹었고, 꽃꽂이를 하던 8층 할머니는 내 졸업식에 꽃다발을 만들어주셨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층 이웃은 알아도 다른 층에 누가 사는지는 도통 깜깜이다. 또 서로의 집을 자연스레 오가던 과거와 달리, 아무리 이웃이어도 매우 친해지지 않는 이상 집을 방문하는 것은 결례이다. 경비아저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비아저씨의 얼굴 정도만 대충 아는 정도다.



초코파이가 '정(情)'으로 성공적인 마케팅을 했듯이, 그 시절은 정말 '정'의 시절이었다. 20년 이상 지난 지금은 많이 변했다. '정'의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대가족이 핵가족화되고,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이웃과 얼굴 마주치고 어울리기에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정'의 문화에 대한 향수가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8'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웃 간 스스럼없이 지내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열광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예전처럼 이웃과 친하게 어울리지도, 경비아저씨와 막역하게 지내지도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가슴속에 '정'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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