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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리 Oct 26. 2022

교문 앞 일탈의 공간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사람들의 '초품아'(초등학교 품은 아파트)가 다른 단지 대비 비싼 이유를 여실히 알겠다. '초품아'에서는 아이들이 차 다니는 길을 건널 필요 없이 단지 내에서 안전하게 등교하고 하교할 수 있다. 따라서 '초품아' 아파트 단지의 가격에는 초등학교 만 6년 간 아이들의 안전과 부모의 안심이 반영된 것이다. 요즘 점심 무렵 초등학교 주변을 지나면 교문 앞에는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를 볼 수 있다. 또 하교하는 아이를 마중 나온 엄마들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안전에 민감한 사회가 되면서 보호자와 함께 하교하는 아이들이 많아 보인다.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하교는 셀프였다. 내가 어릴 적 살던 아파트 우리 동부터 학교까지 가려면 언덕길의 큰 대로 한 개에 작은 찻 길 두 개 정도는 건너야 했다. 심지어 작은 찻길 하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잘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1학년 때부터 어른 없이 등교하고 하교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랬으니, 그때는 아이들 스스로 안전을 챙기던 때였다.



요즘의 초등학교 하교 시간에는 보호자들과 보호자의 자동차들로 북적북적하다면,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하교 시간은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 아이들의 호주머니 용돈을 노린 장사꾼들과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동전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는 아이들로 문전성시였다.



그중 우리 교문을 가장 자주 찾았던 분은 뽑기 아주머니였다. 뽑기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교문에 터를 잡고 장사를 했다. 오징어게임에도 뽑기 게임 에피소드가 나오듯이, 우리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의 초등학교 교문에는 뽑기 아주머니가 있었으리라. 원형의 뽑기 안에는 하트 모양, 세모 모양, 별 모양 등 다양한 모양이 찍혀 있었다. 바늘을 이용해 이 모양대로 뽑기를 살려내면 새로운 뽑기 하나를 더 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바늘이 놓인 쟁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집중했다. 그것도 나름의 기술이라 매일 같이 앉아서 열중하는 아이들이 '뽑기 하나 더'의 혜택을 자주 누렸다. 나는 뽑기를 먹는 데에만 관심 있었지 하나를 더 받기 위해 열중하는 편은 아니었다.

우리 학교 뽑기 아주머니의 시그니쳐 메뉴는 뽑기 빵이었는데, 원판 모양의 뽑기보다 뽑기 빵이 더 인기가 많았다. 뽑기는 국자에 설탕을 녹여서 호떡 만드는 누르개로 눌러 원판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뽑기 빵은 뽑기와 달리 누르개로 누르는 과정을 생략했다. 마치 도톰한 빵 모양처럼 생겨 뽑기빵이라고 불렸다. 나도 실제로 뽑기를 먹기보다는 뽑기빵을 먹은 기억이 더 많다. 뽑기빵의 매력은 겉바속촉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겉바속촉의 매력을 알았던 것이다. 원판 모양의 뽑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딱딱한 식감인 데에 비해, 뽑기빵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입에서 녹는 맛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병아리 아저씨가 우리 학교를 찾았다. 병아리 아저씨가 오시는 날은 귀여운 것에 환장하는 여자애들 사이에 금방 소문이 난다. "야, 오늘 병아리 아저씨 왔대." 하면 6교시가 끝나기 전 쉬는 시간에라도 나가서 병아리를 구경하고 오곤 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면 교문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인다. 아저씨는 종이로 된 박스에 빽빽하게 병아리를 담아 오셨고, 병아리들은 좁은 공간 안에서 오밀조밀 모여 삐약삐약거렸다.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아우성이 교문 멀리까지 들렸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병아리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고, 아이들이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면 아저씨는 비닐봉지에 병아리를 한 마리 담아주었다.

병아리 장사는 지금처럼 동물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 할 장사이다. 아이들이 병아리를 집에서 보살펴 닭까지 키워내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우리 친척 언니만 해도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 와 몇 마리의 닭을 만들어냈다. 친척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가 병아리와 닭의 중간인 동물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면 어린이 양계 신동이라고 봐야 하는가. 친척 언니는 그토록 원하던 강아지를 부모님이 분양받아 주자 병아리 사 오기를 멈추었다.



가장 빈도가 낮게 교문 앞을 찾았지만 그 어느 장사보다 센세이션이었던 것은 트럭 바이킹이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교문 앞에 트럭 바이킹이 왔다. 아저씨가 트럭에 미니 바이킹을 설치해서 500원을 받고 아이들을 태워줬다. 미니 바이킹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줄이 놀이공원을 방불케 했다. 아이들은 500원짜리 동전을 작은 손에 꼭 쥔 채로 바이킹을 타고 싶어 길게 줄을 섰다. 나도 몇 번 타 봤는데 놀이공원의 바이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스릴 넘쳤다. 트럭에 설치한 바이킹은 나름 잘 만들었겠지만 조악했다. 살짝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양새가 바이킹이 더 스릴 있게 느껴지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소규모 자영업자가 안전 관련해서는 얼마나 신경 써서 만들었겠는가.



요즘처럼 보호자와 함께 하교하는 문화에서는 위와 같은 교문 앞 장사가 있을 수 없다. 아이들 하교하는 데 장사꾼이 북적이면 학부모들이 강력하게 민원을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뽑기니, 병아리니, 바이킹이니 하는 것들이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과는 거리가 멀기에 교문 앞 장사 문화는 많이 없어져서 다행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교실 안에서 놀거나 운동장에서 놀던 기억보다도 교문에서 놀았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교문은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할텐데...'라는 생각을 품고도, 호주머니를 열어 동전을 내는, 소박한 일탈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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