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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을 정리하는 시간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금요일 오후 2시 49분이다. 학생들이 오기 전이라 센터는 한산하다. 책상은 각종 파일과 서류로 수북하고 모니터는 수식이 가득한 엑셀과 한글이 동시에 열려있다. 마지막으로 수식을 입력하던 엑셀 하단의 커서가 계속 깜빡인다. 머리를 식힐 겸 고개를 돌려 바깥을 본다. 창 밖의 날씨는 조금 흐리다. 지금 내 손에는 통장이 하나 들려있다. 통장은 거래내역이 다 찼고 마지막 면만 조금 남아 있다. 빠른 업무 처리를 위해서 통장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어제는 직인을 놓고 가서 괜한 헛걸음을 했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이 통장은 꽤 오래되었다. 오래...라고 해봤자 한 달이다. 한 달? 한 달이면 이 세계에선 통장 하나쯤은 '오래'라는 표현을 쓰기에 충분하다. 이마트, K마트, G마트, Y철물점, 보물창고, S열쇠. KT. 일주일만 지나도 이 통장은 숱한 거래처들이 기록된다. 통장을 새로 교체하기 위해서 사무실을 나섰다.


이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택배기사, 마트 직원, 생협 배달 기사, 사람들은 숨을 헥헥거리며 이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계단을 내려와 좌측으로 조금만 걸으면 중앙시장이 나온다. 나는 사거리에서 직진하지 않고 항상 우측 횡단보도를 건넌다. 구시청 방향 횡단보도 건너편에 휴대폰 가게와 연세약국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면 코끼리 약국도 나온다. 365일 폐업 중인 옷가게를 지나고 휴대폰 가게를 몇 개 지나는 사이 인도 양쪽엔 노점상들이 있다. 노지에서 따온 싱싱한,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과일과 채소들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조금만 더 걷다 보면 303번과 220번 버스가 서는 정류장이 나온다. 웬만한 버스는 모두 이 정류장을 거쳐간다. 정류장 뒤엔 낡은 공중전화박스가 있다. 신흥동 N지점은 공중전화와 버스 정류장 바로 뒤쪽에 있다. 그곳엔 키가 작은 사내가 사시사철 호두과자를 굽고 있다. 그는 한 손엔 목장갑을 끼고 있다. 그는 내가 아는 어떤 선생님의 남편을 닮았다. 그에게 호두과자를 산 적이 있다. 그는 오늘도 목장갑을 낀 채 호두과자를 굽고 있다. 조만간 호두과자를 사 먹을 생각이다.


은행은 보통 오후 네시에 문을 닫는다. 신흥동 N지점도 오후 네시에 문을 닫는다. 창구 직원은 어제 나에게 통장을 교체하려면 직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제 나는 직인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직인이 없으면 통장을 바꿀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안 시각은 오후 3시 53분이었다. 인감, 직인,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은행은 항상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아닌 것들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늘 은행을 두 번 찾게 된다.


지금은 오후 3시 19분이다. 오늘은 직인을 챙겨 왔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오후 네시 전에 통장을 바꿀 수 있다. 은행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은행은 고객들로 가득하다. 어제 보았던 청경 두 명이 고객들 사이에서 분주하다. 그들은 때때로 장난도 친다. 그들은 마치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번호표를 하나 뽑아서 자리에 앉았다. 창구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쪽이다.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창구를 바라봤다. 그때 나의 행동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가장 빠른 번호는 299번. 내 번호는 337번이다. 대기자는 38명이다. 환율, 시세, 금리, 무이자, 비과세, 전세자금우대, 이십 년 거치 상환, 십만 원으로 일억 만들기. 은행은 삶의 절대적 가치를 통장에 적힌 숫자의 크기로 말한다.


띵동! 띵동!

창구 번호 중 하나가 300번으로 바뀐다.

"300번 손님 안 계십니까? 300번 손님!"


젊은 청경 중 한 명이 두 손을 입가로 모으더니 번호를 외친다. 그는 마치 로또 당첨자를 부르는 듯했다. 그는 어제도 그랬다. 하지만 오늘도 그의 발랄한 외침은 의미 없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의 외침은 이 공간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스총만큼 쓸모가 없다.

띵동! 띵동!

세 번째 창구 번호가 301번으로 넘어간다.


"301번 고객님 안 계십니까? 301번 고객님!"


젊은 청경은 더 큰 소리로 외친다. 하지만 301번 고객은 이곳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이제 은행 안의 대기자는 나를 포함 36명이다.


촤르륵. 촤르륵. 철컥!


뒤에는 동전을 세는 기계가 한 대 있다. 그 옆으로 현금 인출기 세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인출기 앞에 선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뒤쪽 벽에는 대형 모니터가 붙어 있다. 모니터는 음소거 상태로 바깥 소식을 전해준다. IS는 인질 한 명을 참수했고 오바마는 IS 거점에 지상군 투입을 검토 중이다. 신변을 비관한 사내가 마포대교에서 투신을 했다. 7번 국도에서 덤프트럭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승용차를 덮쳤다. 가해자는 멀쩡했지만 피해자는 즉사했다. 동전을 세는 기계 앞에서 청경과 아주머니 한 분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동전 소리, 차임벨 소리, 핸드폰 소리, 구두 발자국 소리. 지폐 넘기는 소리, 전화벨 소리. 탁탁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띵동! 띵동!

"303번 손님 안 계시나요? 303번 손님!"


청경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의 여자가 무릎 위의 가방을 바짝 앞으로 움켜쥐더니 3번 창구로 향한다. 1번, 3번, 4번 창구와 달리 2번 창구는 좀처럼 번호가 바뀌지 않는다. 여직원은 고객과 십 분이 넘게 통화 중이다. 나의 모든 관심은 그녀에게 집중된다. 그녀는 옅은 화장기에 눈매는 서글서글했고 콧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짧은 단발머리에 살결은 희고 고운 편이다. 수화기를 귀에 댄 그녀는 모니터와 키보드를 번갈아가며 뭔가를 열심히 입력하고 있었다. 일이 뜻대로 안 풀리는지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점점 고조됐다.


"그러니까 고객님! BC카드....

아니 BC카드....아니 BC카드....

접수가 제대로....아 죄송....확인..."


그녀는 점점 양볼이 붉어졌고 이따금씩 입술을 깨물었다. XX라고 욕을 한 것도 같다. 아마도 고객의 주택청약 계약서 숫자가 틀렸거나 카드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거나 아니면 고지서 수령지 주소를 잘못 적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의 잘못을 책임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어쩌면 그녀는 동료나 선임의 잘못을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

띵동! 띵동!

"309번 손님 안 계시나요? 309번 손님!"

"309번 손님 안 계십니까? 309번 손님!"


젊은 청경 두 명이 시간차를 두고 번호를 외친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기 어쩐 일이세요."

"통장정리하러 왔어요."

"어머! 저도예요. 아휴 몇 푼 되지도 않는 통장이 어찌나 많은지."


그녀도 통장을 정리하러 왔다. 그녀는 통장을 펴 보이며 청하지도 않는 통장 내역을 보여준다.


"잘 지내시죠? 다음에 또 봬요."


나는 그녀를 아는 척했지만 사실 잘 모른다. 그녀의 나이도, 이름도, 일하는 곳도.


띵동! 띵동!


311번과 327번 사이의 시간이 불규칙하게 흘러간다. 나는 번호표를 만지작거리며 내 차례를 기다린다. 세계는 이 은행 창구 4개의 사정과는 별개로 돌아간다. 아니, 반대로 이 은행의 3번 창구 직원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전 세계의 운명을 가른다. 중동발 호흡기 증후군, 메르스는 국내에 15번째 감염자를 발생시켰다. 그것 또한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 하나로 비롯되었다. 점 하나를 더 찍거나 0 하나를 더 보태면 어떤 세계는 발칵 뒤집어진다. 아득한 대륙과 바다를 너머 오바마의 시간, 푸틴의 시간도 흘러간다. 시진핑의 시간과 메르켈의 시간도 흘러간다. 경북 칠곡군 김 씨 할아버지의 시간도 흘러간다. 중앙 시장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호떡을 파는 사내의 시간도 흘러간다.


띵동! 띵동!

"336번 손님 안 계시나요? 336번 손님!"


내 번호는 337번이다. 이제 이곳은 나를 포함한 두 명... 아니, 아니다. 33명이다. 아니 37명, 40명이다. 모르겠다. 대기 번호는 줄었는데 은행은 여전히 고객들로 넘쳐난다.


띵동! 띵동!

"337번 고객님 안 계십니까? 337번 고객님!"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통장이 가득 찼어요."

"새 걸로 교체해 드릴까요?"

"네! 새것으로 바꿔주세요."

"직인은 가져오셨죠?"

"여기 있습니다."

"다 됐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오래된 통장을 교체했다. 빳빳한 새 통장은 보기에 좋았고 촉감도 훌륭했다. 이마트, 보물창고, K마트, KT. S열쇠, M토리 하우스, J문구 육천구백구십 원.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새겨질 무수한 거래처와 그 흔적들, 오래되고 낡아질 통장 하나. 문득 내 인생도 바꾸고 싶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새로운 삶으로. 완전한 여백으로. 하지만 인생을 통째로 바꿔줄 '마법의 직인'은 없다. 우리의 삶은 다시 기록되지 않는다. 삶의 긍정은 긍정대로, 오류는 오류대로 기록된다. 은행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창구 뒤의 현수막에 적힌 세계적인 풍경, 신흥동 N지점의 문구는 이렇다.


"고객님, 직원들의 응대에 만족하셨나요? 전화 점검 시 매우 만족이라고 해주세요."


금요일 오후, 어떤 은행의 세계적인 풍경은 이렇게 끝났다. 그런데, 요즘 다들 통장정리는 하시나요?


2015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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