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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주는 약사의 한마디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달력을 보니 병원에 가야 할 날짜를 넘겼다. 병원을 가기 전날은 시험을 망친 학생이 성적표를 받아 들기 직전의 두려운 심정이 된다. 금요일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다. 모니터를 응시하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어둡다.


"수치가 많이 높네요."

"생활에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딱히 별로.."

"이제 약을 좀 늘려야 할 것 같은데... 한 달만 더 지켜보도록 하죠.."

"네. 노력하겠습니다."

"다행히 알부민 수치는 정상이네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높은 수치에 놀랐다. 약을 늘리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퇴근길의 맥주 한 잔, 식후의 커피 한 잔 귀찮아서 대충 먹은 끼니들 피곤해서 포기한 저녁 운동. 보통 사람들에겐 평범했을, 아니 하품이 나도록 지루했을 일상이 병원을 다녀오는 날이면 무절제한 삶으로 돌아온다. 약국에 들러 처방전을 건넸다.


"요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얼굴이 좋아 보여요."


그녀는 매일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말을 건넨다. 그 한마디에 눅눅했던 기분이 조금 풀어진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진심은 아닐지라도 실체가 의심되는 약 몇 알의 효과보다는 오늘처럼, 심란한 하루를 열기 전 그녀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더 큰 '플라세보' 효과를 준다. 긴장이 풀리면 허기가 진다. 출근 전 정류장 근처 단골 분식집에서 천오백 원짜리 김밥 한 줄을 주문했다. 이 식당은 단무지 대신 김치를 준다.


아이들이 오는 다섯 시까지 사무실은 평온하다. 고요하지만 속사정은 치열하다. 다른 일터의 사람들이 퇴근을 준비하며 책상을 정리하는 시각 센터는 놀랍도록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센터에 다른 아이들과 갈등 중인 여학생이 한 명 있다.


그녀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표현하며 모두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질문을 하고 친구나 선배, 선생님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렇지만 그 질문과 상담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관심을 받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녀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거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생각은 없다.


그녀는 사람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녀의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난할 대상이 없는 곳에서의 시끄러운 수다, 혹은, 무언의 침묵 속에서 감지되는 서로 간의 불편한 간극은 누구의 책임일까?


한 사람은 스스로 만든 벽을 허물기를 거부하고 다수는 그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다름을, 차이를, 답답함을, 그리고 왜 사랑받고 싶은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갈림길에서 언제나 혼자가 된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가지 않는다. 숱한 사람들이 스쳐가는 사거리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주기를 기다리지만 아무도 그녀를 불러주지 않는다.


"선생님, 전요 어렸을 땐 갖고 싶은 거나 원하는 것이 있을 땐 그냥 울면 모든 게 해결 됐었는데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울어도 소용이 없어요.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문제를 해결해 주던 악어의 '눈물'이 이제는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어 본 적이 없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울어 본 적도 없다. 새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졸라 본 적도 없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떼를 쓴 적도 없다.


"왜 그랬을까?"


힘들어도 눈물이 나지 않는 이유

고민이 있어도 안으로만 삭히는 이유


살면서 스스로에게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사랑받고 싶어 하는 한 여학생의 솔직함으로 인해 그 궁금증 두 개가 풀렸다. 그때 내게 눈물은 사치였다. 뭔가를 갖고 싶거나 고민이 있어서 울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최선이었다. 삶을 선택할 수 없는 운이 나쁜 아이였다.


갈림길에 서면 혼자가 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중앙시장 사거리 갈림길의 붉은 신호는 너무 길다. 처음 보는,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만의 갈림길 앞에 선다. 그들은 멈춰 있는 파란 버스를 타야 하기에 붉은 신호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한 사람이 길을 건너자 뒤의 사람들이 건넌다. 혼자인 나는 여전히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2015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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