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지각이다. 야행성인 내게 아침 일찍부터 수업을 해야 하는 방학은 거의 형벌 수준이다. 느림보 개학아! 어서 와서 이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고난을 빨리 끝내주지 않을래. 미리미리 수업 준비를 해야 하지만 공부방 평가서 때문에 서류 정리 한 두 개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어 버린다. 버스 안에서 오후 수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했다. 오늘 오후는 특별수업이다. 고민하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접속사를 활용한 이야기 글쓰기! 초등부 아이들이랑 몇 번 해보았지만 어려워해서 말았었는데 중등부는 이런 수업이 가능할 것 같았다. 나른해지기 쉬운 점심시간 이후는 바로 독서수업이다. 그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온전히 텍스트로만 가득한 책을 반강제로 읽히게 했다. 지구를 들었다가 태양계 바깥으로 던져 버릴 만큼의 상상력으로 무장을 해야 할 청소년 시기에 만화책은 아이들의 도저한 상상력을 말살시킬 뿐이다.(물론 모든 만화책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녀석들이 들고 있는 책들을 보면 절로 한숨만 나온다.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접속사'가 뭐냐고 물었다.
"선생님! 그거 영어잖아요?"
엄마야, 세상에나. 접속사가 영어라니? 문법 수업에만 치중한 결과가 바로 이런 건가? 하긴 영어로는 컨정션(Conjunction)이라고 하니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뭔가 찝찝하다! 이번엔 다른 녀석이 '접촉사고'가 뭐예요? 란다.
“푸하하. 너는 인마 것도 모르냐?”
숯댕이처럼 짙은 눈썹만 위아래로 치켜뜨며 입을 다물고 있던 한 녀석의 야유와 웃음이 거실을 한바탕 휘몰고 지나간다. 앵두처럼 앙증맞고 오종종한 입술에서 어찌 저리 험한 말들이 튀어나올까. 중등부에 오자마자 든 생각인데 나도 '시팔'이나 쌍시옷 들어가는 가벼운 욕'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긴, 하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등이 나왔다.
의외였다. 시원찮은 반응을 예상했는데 녀석들은 기대 이상으로 나의 이상한 글쓰기 수업을 잘 따라주었다. 일단 주제는 큰 틀만 정해주고 소주제는 자유롭게 했는데 주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연예인, 영화, 돈, 로맨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는데. 모둠을 넷으로 나누고 스케치북을 한 장씩 북 찢어서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 후끈후끈한 교실로 녀석들을 몰아넣었다. 교실마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문제집 풀이할 때 와는 영판 다른 분위기다. 좋았어. 내심 이런 걸 기대했으니까. 수업을 지루해하는 녀석들이 없다는 것, 수업에 흥미를 보였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아~ 지금까지 했던 수업 중에서 재일로 재밌다"
한 녀석이 지나가는 말로 한다. 연예인, 빅뱅, 소녀시대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또 까르르 자지러진다. 다른 모둠은 제법 진지한 분위기인 데다가 표정도 상당히 심각하다. 수업 종료 이십 여분을 남겨놓고 한 모둠씩 발표를 시켰다. 스토리야 뻔할 뻔자고 앞뒤 내용도 안 맞고 철자도 부지기수로 틀렸다. 그렇지만 자기들의 이야기여서 그랬나? 평소엔 딴짓하고 주야장천 멍 때리기 삼매경으로 일삼더니 이번엔 제법 두 귀를 쫑긋하며 발표자의 글 낭송을 경청한다.
출근시간 삼십 분 만에 날림으로 준비한 수업치 고는 반응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딴에는 열심히 준비한 것처럼 한 모둠의 발표가 끝나고 나면 제법 그럴듯하게 잘한 점과 수정할 부분 등을 정리해 주었다. 이제는 접속사가 영어만이 아니라 우리말에도 있다는 것과 '접촉사고'와는 다르다는 것은 알았을 터이니 녀석들도 헛공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날림으로 하면 안 되겠지. 여하간, 방학 중 수업은 너무 힘들다. 시간표를 보니 내일은 아침부터 증 2 영어다. 뭐냐? 내일 서류 정리할 것도 산더민데. 또 날림인가!
2009년 7월 30일
조폭 혹은 양아치 선생
문제는 항상 청소 시간이었다. 지난주 금요일에도 청소문제로 신입 선생님이 한 아이와 문제가 있었다. 학생의 건방진 태도가 기가 막히다는 듯 P선생님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아이는 늘 자기 청소 차례가 되어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직감했다. 조만간 녀석들과 한바탕 부딪힐 것을. 하지만 기회를 살펴야 했다. 때를 살피는 동안 거울을 보며 일부러 눈을 부라리고 목소리도 걸걸하게 내는 연습을 했다. 간간이 녀석들이 쓰는 비속어도 섞어 보았다. 욕이 입술에 착 달라붙어야 하는데 쫌 어색하다! 험상궂은 표정이야 항상 기본은 되어 있으니 관건은 눈을 어떻게 시종일관 녀석들을 향한 채 일관되게 부릅뜨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목에는 핏대를 좀 세우고 양손은 허리춤에 괸다음 한쪽 발을 내민다. 그리고 왼쪽 발꿈치를 살짝 든 다음 달달달 떤다. 거울 속의 나! 완전 조폭이나 뒷골목 양아치다. 이 정도면 제법 불량스러워 보이겠지? 녀석들도 긴장 좀 하겠지.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선생님을 대하는 게 꼭 친구 대하듯 하는 게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친구 같은 선생님도 좋지만 그것은 차후 문제다. 권위가 있으면서 친구 같은 선생과 권위를 상실한 친구 같은 선생은 고양이가 보기에도 천양지차다. 정신 차리지 못하면 녀석들에게 우스운 선생님이 되고 말 것이다.
"통과 의례야. 머리 큰 얘들 상대하려면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야."
"김 선생 중등부 아이들은 원래 그래? 다들 왜 그렇게 버릇이 없어."
이제 중등부로 온 지 한 달 겨우 지났는데 우리 아이들을 평가절하하는 소리를 계속 듣자니 이것도 무럭무럭 신경질이 났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딴에는 제법 현란한 퍼포먼스도 보여야겠기에 대걸레 위치도 파악해 놓고 푹신푹신한 담요도 몇 개 생각해 놨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청소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수업 분위기는 괜찮았다. 과격하긴 했지만 심리운동도 모두들 즐겁게 참여했다. 문제는 청소시간이었다. 늘 청소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한 녀석이 열심히 거실 바닥을 쓸던 쓰레기봉투를 쓰레기봉투 바로 위에서 훌훌 털어 버렸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먼지는 봉투 위에서 찬란히 흩날렸다. 그렇게 위에서 털어버리면 기껏 한 청소가 소용이 없게 된다고 했더니 이 녀석 벌레 씹은 표정이다. 참았다. 그리고 다시 설명했다. 녀석은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이때다 싶었다.
"이 녀석들이."
거울을 보며 연습한 대로 목소리 톤을 걸걸하게 바꾸고 잔뜩 인상을 구겼다. 바로 이 순간 다른 곳들의 상황은, 나와 쓰레기를 봉투 위에서 날려버린 아이만 제외하고 모두들 평안했다. 청소를 마친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핸드폰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다들 거실로 나와!"
반응이 없다! 좀 약했나. 더 큰 목소리로 호령했다.
"이 자식들, 선생님 말 안 들려. 다들 거실로 모여!"
그제야 한 두 명씩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거실로 나왔다.
"다들 벽으로 붙어!"
"......"
"빨리!"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녀석이 살며시 뒷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손들어!"
"??"
"안 들어! 하! 이 녀석들 봐라."
쭈뼛쭈뼛 주변을 살피더니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니들 친구야. 언제까지 선생님이 먼저 전화해야 해!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선생님 앞에서 이 새끼 저 새끼 육두문자를 날리고. 겁도 없이"
"야 이 자식들아! 니들만 욕할 줄 알아? 선생님은 욕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것 같아?
학생이라면 응당 지녀야 될 기본 상식이야 상식! 니들끼리 있을 때는 욕하든
말든 상관 안 해! 그렇지만 선생님 앞에서는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잖아."
한번 몰아 부칠 때는 끝을 봐야 한다. 나는 그동안 밀린 숙제라도 하는 것처럼 청소와 욕설과, 그리고 그동안 선생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일들을 되짚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들을 향해서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너, 똑바로 안 들어"
"니들 오늘 다리몽둥이 한번 제대로 부러질래?"
그렇게 한참을 불량스러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자세가 맞나? 아! 쫌 불편하다. 티를 내면 안 된다. 녀석들을 한 명씩 불러냈다.
"너는 뭐 잘못했어?"
"선생님 앞에서 욕 한 거요."
"너는?"
"선생님한테 함부로 말한 거요."
"앞으로 또 그럴 거야?"
"아니오"
"들어가!"
"다들 잘 들어. 오늘 청소 엉망이야. 처음부터 다시 해!"
아이들의 행동은 다른 때보다 일사 분란했다. 오늘은 청소를 깨끗하게 한 편이었다. 몇몇 튀는 녀석들을 제외하고 나면 장난이 좀 심한 편이었지 무례하다거나 수업태도가 완전 엉망은 아니었다. 다시 청소를 시키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오늘 우리 아이가 공부방에서 무슨 잘못을 했나요?"
"네? 그게 아니고. 이러저러해서...."
집에 가서 씻으려고 양말을 벗는데 왼쪽 발 살갗이 벗겨진 채 딱지가 붙어 있었다. 퍼포먼스가 너무 과격했나.
2009년 8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