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룡동굴'을 탐사하다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여름 캠프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완전히 긴장을 푼 건 아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을 태우지 않아도 되었다. 어름치 마을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백룡동굴'탐사다. 아이들은 마지막 날도 잠에 취한 채 아침을 걸렀다. 몇 명은 따뜻한 아침밥 대신 어제 먹다 남은 차가운 치킨을 뜯어먹었다.


잠에 취한 채 툴툴거리는 아이들을 확성기 멜로디로 깨웠다. 버스를 타고 이십 분 거리의 백룡동굴로 향했다. 입장료가 꽤 비쌌는데 도착해 보니 그럴만했다. 우리 말고도 여러 팀이 오전부터 동굴탐사를 하러 왔다. 동굴 탐사 안내를 맡은 가이드는 오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그는 키가 상당히 컸고 체격은 호리호리 했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사진출처-pixabay

백룡동굴 탐사를 뜨겁게 환영한다는 그의 인사말은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차라리 감동이었다. 그에게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듣고 우리는 동굴 탐사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랜턴 달린 헬멧과 붉은 탐사 복장을 갖추니 제법 폼이 났다. 가이드는 동굴 입구에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옛날엔 돈이 없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추억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수백 번도 넘게 반복했을 저 상투성 짙은 문구가 한쪽 가슴팍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동굴 안쪽은 상당히 시원했다. 가이드는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탐사 내내 아이들 몇 명이 가이드의 설명을 안 듣고 딴짓을 했다. 가이드는 심기가 불편한지 그때마다 인상을 썼다. 간간이 설명에 짜증 섞인 목소리도 석였다.


그의 설명은 자연스러웠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진정성은 빈곤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탐사할 동굴은 꽤나 위험했으므로 그의 구겨지는 인상과 불편한 목소리는 참기로 했다. 가이드의 까칠함을 제외하면 동굴 탐사는 기대 이상의 경험이었다. 모든 빛이 사라진 동굴의 가장 끝에서 영원을 보았다. 동굴 탐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성남으로 향했다. 나는 올 때처럼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옛날엔 돈이 없는 사람들이.... 하지만 요즘은 추억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성남으로 돌아오는 내내 가이드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확신에 찬 그의 말처럼 '추억이 없는 자가 가난한 자.'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아니 그의 말은 틀렸다. 이제는 '추억'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예전엔 새로 산 옷이나 용돈의 많고 적음이 상대적 박탈감의 전부였다. 지금은 어떤가? 같은 학교에서도 누구는 유럽으로 누구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 추억의 경험치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내 어린 시절의 찬란한 추억이란, 술에 취해 축 쳐진 아버지의 어깨, 용돈 한 푼 없던 가을 소풍, 고교시절 일당 천오백 원짜리 아르바이트 정도다. 돈이 없는 추억은 집 앞이나 동네 어귀를 넘지 못했다. 그런 추억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나는 중학교 2학년때 단체로 갔던 선운사와 고등학교 시절 금오산에서 보냈던 반 친구들과의 일박이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 조용한 사무실에서 폭우를 뚫고 다녀온 여름 캠프를 회상한다. 신나는 래프팅, 생태체험, 동굴탐사. 그것만이 다였을까? 나는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돈이 없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지금의 나는 이 공간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공부방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억이 많은 자가 부자다.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추억에도 돈이 들어야 하는 세상에서. 상투적일지라도.


2011년 8월 5

keyword
이전 24화세상 짜릿했던 '동강 래프팅'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