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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상스 Jul 15. 2024

짧은 소설 - 코피


 나는 키가 적당하다. 적당히 손을 뻗으면 버스 손잡이가 닿는다. 팔이 팽팽하게 당겨져 좀 아프긴 해도 동그란 손 걸이를 움켜질 수 있다. 그러면 된 거다. 뿐만 아니라 도착역에 도달할 때쯤 창가에 앉은 여대생 너머로 팔을 뻗어 부저 누르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 조금은 슈퍼맨 폼이 되어야하겠지만. 책을 읽던 그 여대생 누나가 인상을 찡그리면 실례, 라는 표정만 지어주면 된다. 나는 16살이니까 그 정도 키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로다가, 내 앞에서 키 이야기는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적당히 부아가 치미니까.

 나는 지금 파란색 171 간선버스에 타고 있다. 안 보인다고? 다섯 시 반이기 때문이다. 이 때 버스는 콩나물시루가 된다. 잘 찾아보아라. 버스 손잡이를 생명줄 같이 여기고 사람들 틈에 차곡차곡 묻혀있는 게 나다. 그렇다. 지금은 팔밖에 안 보인다. 하지만 다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왕창 내리게 되면 내가 보일 것이다. 단, 잠시 뿐이므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왕창 더하기 다섯 명 정도가 올라타니까.

 많이 춥다는 의미의 만추의 어느 날답게 밖은 쌀쌀하니 추워, 나는 그럴 줄 알고 목도리를 준비했다. 그럴 줄 알고 군청색 교복 마이 안에 런닝셔츠, 반팔티, 긴팔티, 교복셔츠 순으로 빼곡하게 채워 입었다. 버스기사 아저씨도 내가 그럴 줄 알고 히터를 극단적으로 가동했다. 목도리에 얼굴이 폭 파묻히고 동서남북 잿빛코트에 파묻힌 나는 심히 알에서 부화할 정도로 더웠다. 회사원 아저씨들은 얼굴 없는 로봇처럼 서 있었는데 덕분에 버스가 급정거 할 때마다 앞으로 돌진하던 내가 그들의 방어선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사실 조금 아팠다.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대천왕처럼 서 있는 그들 중 한명의 어깨에 코를 부대낀 나는 아파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뭐하는 아저씨들인지는 몰라도 되게 다부졌다. 절대로 내가 작고 약해서가 아니었다.

 신촌역이 되자 사람들이 대부분 물갈이 되었다. 콸콸콸 쏟아져 내리더니 꿀꺽꿀꺽 다시 올라탄다. 나를 호위하던 사대천왕들이 빠져나가자 그제야 시야가 훤했다. 엇. 올라오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많이 본 얼굴이 보인다. 같은 반 정슬기. 내 뒤에 뒤에 옆에 앉는 여자 애다. 참고로 슬기와 나는 한 개도 친하지 않았다. 그러면 두 개 이상 친한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남자 중학교로 배정받은 동무들의 질투어린 시선과 욕들을 감내하며 남녀합반인 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여자랑 대화다운 대화 한번 못 나눈 사람 취급하는 건가 지금? 맞았다. 눈치 참 빠르다. 

 아무튼. 슬기는 참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녀의 태도와 외모는 한마디로 말하면 공부벌레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그 누구보다 말투가 느렸다. 그녀의 별명이 ‘버퍼링걸’이란 사실을 우리학교 다니는 사람은 다 알았다. 해리포터가 쓰고 다닐만한 커다란 안경을 매만지며 흐느적거리게 말하는 그녀. 그녀의 목소리를 인내하려면 웬만한 참을성 가지고는 힘들었다. 충청도 출신도 아닌데 그렇게 말이 느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슬기를 제외한 반 친구들끼리 탁상공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답은 안나 왔다. 우리 학교 삼 대 미스터리 중 하나가 되었다. 말투 뿐 아니라 슬기는 느릴 수 있는 것은 다 느렸다. 걸음도 느렸다. 달리기도 느렸다. - 걸음인지 달리기인지 구분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반응도 느렸다. - 누군가가 던진 지우개에 맞고 정확히 3초 뒤에 아야, 반응하는 타고난 순발력! 심지어 밥도 느리게 먹었다. - 수업시작 종칠 때까지 먹었다. 

 슬기는 내 얼굴을 알아보고 먼저 안녕, 했다. 나도 따라 안녕, 했다. 그녀는 나랑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지만 그 뒤로 꾸준히 올라오는 승객들에게 차근차근 밀려 불과 나와 한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게 되었다. 슬기는 내 바로 옆 손잡이를 잡고 어색한 듯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시켜 두었다. 헌데 어째 기분이 요상했다. 사람들도 나의 요상한 기분을 알아챘는지 슬기를 슬금슬금 밀어 내 코앞에다 데려다 놓았다. 슬기의 콧바람이 얼굴에 느껴졌다. 더불어 로션 냄새도. 아기피부의 비결은 존슨즈 베이비 로션인가 보았다. 아마 슬기도 내 콧바람을 느낄 터였다. 슬기의 단정하게 묶은 이마가 버스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대놓고 슬기를 볼 수 없어 흘끔흘끔 보았다. 슬기는 혹시 금쪼가리라도 떨어져있는지 땅만 열심히 보았다. 

 여자랑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토록 가슴이 다듬이질을 하다니. 이거 정말 놀라운 체험인걸. 나는 갑자기 171 간선 버스가 좋아졌다. 다섯 시 반도 좋아졌다. 슬기는 어색함에 돌연 작심했는지 책가방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맞아 죽어도 외워야할 필수 영단어 2000’을 펼쳐들고 뭔가를 고시랑대었다. 나는 그녀의 옹알거리는 입술을 보았다. 느리게 아쿠, 발생하다, 하는 그 입술을. 

 “너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나의 말에 슬기가 책에서 고개를 재빨리 땐다. 하지만 나에게로 향하는 초점은 성격처럼 느린 구석이 있어 순간 흐리멍텅해진 그녀였다. 

 “으응? 으응.”

 “공부가 무진장 재미있나 봐.”

 슬기는 뜸을 들이다가 느리게 말한다. 그녀는 기질적으로 뭐든지 심사숙고 했다.

 “으응,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밖에 없어서…….”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티내지는 않았다. 나도 그 기분 알았다. 불가능이란 없다! 외치며 하루에 다섯 컵 이상의 우유를 마시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순간 버스가 급하게 커브를 했다. 나는 타잔을 따라다니던 치타처럼 반 공중에 떠서 의지할 데라곤 손잡이밖에 없었다. 슬기는 타고난 반사신경에 의거, 버스가 좌로 커브하면 어맛, 하면서 좌로 휩쓸리고 정신을 차리고 무게중심을 우로 쏠리게 하면 버스가 우로 커브를 돌아 또 어맛, 휩쓸리고. 나는 제인을 구하려는 타잔처럼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나 살기도 바빴다. 

 어느새 버스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고 나와 슬기도 손잡이를 잔뜩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슬기는 어지러운 듯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띠용, 하는 그녀의 표정. 나도 덩달아 띠용, 했다. 그렇게 귀여울 수가. 내가 잠시 동안 그녀의 백치미에 빠져있는데 이번에는 정거하던 버스가 버럭 급출발을 하는 것이었다. 버스 내 모든 입석자들은 꽁무니 쪽으로 내달렸고 서로 몸에 도미노처럼 부대꼈다. 나와 약 세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슬기도 여지없이 몸이 버스 뒤편으로 쏠렸는데, 하필 고꾸라지면서 박치기한 곳이 내 미간이었다.

 턱!

 내 미간을 중심으로 얼굴 전체가 둔탁함으로 진동한다. 어맛! 하면서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이 우선 세 개로 보였다. 그러다가 그 세 얼굴이 시계방향으로 흐릿하게 뱅글뱅글 돈다. 고막에서는 티브이가 화면조정 할 때처럼 위잉 난리를 쳐댔다. 나도 모르게 우욱, 하면서 사팔뜨기 얼굴로 쓰러지는 데, 손잡이에 왼손이 걸린 덕분에 넘어지는 큰 창피를 면했다. 그러나 죽을듯한 창피는 면했지만 미칠 듯한 창피는 남아있었다. 

 나는 온통 노란 풍경 가운데, 슬기가 허리를 접어 고꾸라지면서 이마를 댄 것이 고작 내 이마였다는 현실에 일단 창피해했다. 영화나 시에프에서 보면 남자의 가슴팍에 필연적으로 포옥 안기고 그러던데.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혹, 치명적인 흉기에 당한, 그 흉기가 다름 아닌 그녀일 수밖에 없어서 어쩌다보니 주인공을 죽이게 되는 내용이 담긴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매우 슬픈 표정을 짓고, 괜찮니? 미, 미안해, 하는 슬기를 보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 나는 괘, 괜찮아, 너는 괜찮니? 하였지만, 사실, 무조건 멀쩡해 보이는 그녀였기에 나는 두 번째로 창피하였다. (그 순간 별빛처럼 그녀의 몸이 그다지도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창피했던 것은 들이받힌 건 마빡인데 코에서 홍수 난 강줄기처럼 코피가 흘러 입술을 짭쪼롬하게 적셨다는 사실이었고, 더군다나 그것이 쌍코피였기에 나는 따따블로 창피했다.

 슬기는 어쩔 줄 몰라 허공에 손만 바동거렸다. 나는 만사가 어이없어서 시골에 사는 코흘리개처럼 코피를 질질 흘렸다. 졸다가 화들짝 놀란 우리 쪽 창가에 앉은 아주머니가 보다 못해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 내 양쪽 콧구멍에 쑤셔 박음으로써 상황은 진정되었다. 

 슬기는 멍한 나의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어, 떻게……. 이마에 혹이…….”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나는 내 몸이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이마를 만진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슬기야. 나는 두둥실 떠오를 거 같았다. 

 끼익!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이번에는 내가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포옥 안겼다. 그녀의 가슴에 안겼다. 

 내 얼굴을 안고 내 등을 토닥이며 말하는 슬기. 

 “어머, 너 괜찮아?”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코피가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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