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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 himi Nov 17. 2020

"오천 원입니다."

길고 긴 이야기의 끝   [에이섹슈얼의 경우4]

*읽는 이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황급히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Glen한테 작별인사는 했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임신테스트기는 약국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검색해보니 다이소에서도 판단다. 와, 다이소에는 정말 없는 게 없는 거 아닐까. 여하튼 어디서든 임신테스트기를 구했다면 관계로부터 2주 후부터 정확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 첨단 장비의 가격은,




"오천 원입니다."

"아, 그러면... 두 개 살게요."

확실한 진단이 필요했다. 제발 아니길.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답이 필요했다. 부피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가벼운 까만 봉지를 들고 일단 집으로 왔다. 거사를 치르기 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아침 첫 소변, 평평한 실온에서 3~5분. 한 줄은 정상. 두 줄이 나오면, 죽을까?


죽는 건 까다로운 문제니까 우선 병원을 찾아야겠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나 심각한 기형이 예상되는 경우가 아니면 낙태는 불법이란다. 그러면... 성폭행을 당했다고... 아니, 그걸 성폭행이라고 해도 되나? 나 저항 안 했잖아. 아니 아니, 그래도 많이들 낙태 시술받지 않나? 근데 나도 받을 수 있나? 가족 몰래? 그럼 일단 산에서 굴러야 하나? 머리에 헬멧 쓰고 산에서 구를까? 굴러도 안 되면 병원을 한 번 찾아보고, 어... 죽을까?


뭘로 시작하든 '죽을까?'로 이어지는 생각을 껴안고 잠들었다. 아침이 되었다. 약국에서 받아온 비닐봉지째로 손목에 걸고 학교 화장실로 향했다. 집에서 하면 몰래 버릴 수 없으니까. 이제 뚜껑 닫고 5분. 첨단기기에 묻은 내 더러운 소변이 다른 데에도 묻을까 두툼한 휴지 위에 얹고, 이번엔 그 휴지를 변기 커버 위에 얹었다.




한 줄. 이미 나온지 5분을 넘긴 것을 확인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10분이 넘게 키트를 응시했다. 변하는 건 없었다. 사후피임약이 선물한 85퍼센트의 확률이 나를 살렸다. 테스트기를 휴지로 둘둘 말아 까만 비닐봉지에 넣었다. 비닐봉지와 함께 '문란한' 기억을 꽁꽁 묶어 휴지통에 버렸다. 그러고도 불안해 휴지를 더 뜯어 비닐봉지 위에 덮었다.


기쁨인지 안도인지 슬픔인지 원인 모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꾹 참고 검색기록을 모두 지운 후 서둘러 일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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