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내 멋대로 명명한 구름에 가려 흐릿한 해를 가리킨 운식(雲蝕). 우리 부부의 일상에 운식이가 끼어든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이 녀석 나갈 생각을 않는다. 언제 우리의 앞날에 구름이 걷히고 쨍쨍한 햇볕이 들지 알 수가 없다. 구름만 얌전히 끼어있다면 다행일까 요즘은 컴컴한 빗방울까지 하루종일 떨어지고 있다.
제대로 궁상을 떨며 살아보기로 했다. 마치 내 의지가 시킨 척 다짐하며 오늘은 유통기한 이틀이 지난 우유로 아침을 채웠다. 1리터짜리 우유 한 팩을 하루이틀에 홀랑 마시던 시절은 다 지났다. 썩기 직전까지 아껴 마신다. 우유팩 꼭대기에 붙은 날짜에 일주일을 더한 날까지로 썩은 것의 기준을 정했다. 배탈을 일으키는 상태가 되기 직전까지. 흰 우유를 물처럼 마셨던 날들이 엊그제 같았는데 궁하면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야박해지는구나 싶다. 예전 같았으면 기한 지났으면 먹지 말고 좀 버리라고 잔소리하던 아내도 열흘까지도 괜찮지 않냐며 은근슬쩍 말을 바꿔 던졌다. 그래, 본인은 우유를 못 마시고 우리 집에서 나만 마시니까 그런 무책임한
가게에서 유통기한이 다 된 우유가 가끔 한 팩씩 남는 날이 있다. 그날은 우리 집 냉장고에 우유가 들어오는 날이다. 내 덩치가 얼만데, 전날 일한게 얼만데 아침에 우유 한 잔으로 배가 찰리가 없었다. 결국 냉장고에서 말라가는 냉동오징어 김치볶음밥을 꺼냈다. 밥 두 공기면 둘이서 이틀까지도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오는 게 김치볶음밥이다. 올드보이로 살기 싫다며 냉장고를 뒤져보는 아내도 별 수 없이 김치볶음밥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물릴 때도 됐지. 그럼 내일은 냉동새우가 들어간 김치볶음밥을해줄게.
오늘은 내가 비번이라 쉬는 날이다. 쉬는 날이니까 일해야 한다. 아내가 준비를 마치고 가게를 오픈하러 내려가면서부터 나의 일은 시작이다. 우선 현관문 앞에 쌓여있는 서너 개의 수박을 부엌으로 옮긴다. 수박 배송은 한 통당 박스 하나에 포장돼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박스를 뜯어서 꺼내야 한다. 도마와 대야 두 개, 채를 준비하고 니트릴 장갑을 착용한다. 그러면 수박 바를 준비 끝. 수박 양 꽁지를 잘라내고 반통을 가른 다음 검은 줄무늬 한 줄마다 칼을 깊게 쑤셔 표시를 한다. 그 검은 줄무늬에 수박씨들이 모여있으므로 표시를 해두면 수박씨 바를 때 용이하다. 껍질을 벗겨내고 수박씨를 바르고 엄지손가락 크기로 자르고 대야에 담긴 채에 옮겨 담고 다시 팩에 소분하여 냉장과 냉동으로 구분하여 보관하면 가게에서 판매할 수박주스 재료준비가 완료된다. 얼음과 물을 섞지 않은 정말 말 그대로 생과일주스인 수박주스는 이렇게 나의 희생으로 힘겹게 탄생한다. 재료준비가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수박을 요리조리 자르다 보면 온통 흘러나온 즙으로 난리가 난다. 바로 정리하고 닦아내지 않으면 부엌은 끈적거림은 둘째치고 날벌레가 떼거지로 곡예비행을 펼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박을 썰고 소분하는 과정에서 채에 걸러진 채로 대야에 남은 수박과즙을 컵으로 옮겨 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게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는 마셔본 사람만 알 것이다. 정말 억지로 짜내지도 않고 수박에서 그냥 흘러나온 물을 모은 순수 수박과즙이다. 냉동실에 조각얼음을 퍼다 대야로 쨍그랑 담아 바로 그 자리에서 들이키면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기가 막히다. 처음에 뭣도 모르고 버리다가 한 번 맛을 본 이후에는 아내도 나도 항상 그 과즙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 수박 한 통에 반 컵 정도밖에 나오지 않은 귀한 주스다.
'이제 한숨 돌려볼까.'
겨우 소파에 앉아 한숨 쉬어볼까 싶으면 여지없이 벨소리가 울린다.
"여보, 진짜 가까운 곳에 배달 들어왔어. 여보가 갈래? 아니면 라이더 보낼까?"
"아냐, 내려갈게."
엉덩이 한쪽이 소파에 닿기도 전에 일어나 차키를 챙겨 내려갔다. 시계는 점심시간을 가리켰지만 여전히 밖은 어두컴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