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잊은 시간

by 하늘위로

그 후로 김이분 할머니의 삶은, 말을 잊고 지낸 시간이었다. 거짓 웃음조차 나오지 않자 더 이상 이웃과의 대화도 힘들었다. 그저, 할아버지와 만든 이 화분 같은 집을 곱게 가꾸는 것 외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TV도 신문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지면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계속해서 걸었다. 할아버지에겐 미안하지만 이것이 할머니로선 최선이었다. 그래도 삼시세끼 밥은 잘 챙겨 먹었다. 마음은 뻥 뚫렸지만 몸은 건강했다.


할아버지가 떠난 후 10년, 마음이 황폐할 때로 황폐해진 시기였다. 김이분 할머니는 하루 열두 번 이상 왔다 갔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같은 풍경이 지루했지만, 다른 의미로 안심이 됐다. 후드득 비가 내리면 그대로 맞았다. 감기가 걸려도 그대로 앓아누우면 됐다. 오히려 아프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고통스러워도 그건 또 그거대로 괜찮았다. 그만큼 할머니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때 은아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불쑥 김이분 할머니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봄바람 같은 따뜻한 아이였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타인과 대화를 했다. 말을 하지 않아야 살 것 같았는데, 말을 하니 살 것 같았다. 그동안 벌은 세상이 아닌 내가 받고 있었나 보다. 할머니는 그제야 토닥토닥 제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그날 이후 김이분 할머니는 은아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됐다. 사실, 그 이전에도 둘은 여러 번 스쳤을 것이다. 서로를 몰랐을 뿐. 안다는 것의 힘은 이렇게 대단하다. 찰나여도, 아주 멀리서도 서로를 인지하니까 말이다. 간략한 인사를 건넸던 몇 번의 우연 다음, 은아는 할머니네 놀러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여름날 저녁, 두 사람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마루에서 옥수수와 수박을 먹었다. 여러 모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이야깃거리는 많았다. 대부분 의미 없는 말들이었지만, 둘은 쉼 없이 말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짧지만 귀한 시간이었다. 할머니도 실타래처럼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은아는 울어버렸다. 그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가슴에 담아두었을까, 은아는 마음이 아팠다. 다시 할머니를 웃게 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가로등 앞에서, 은아는 그렇게 다짐했다.


은아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은 황지선 언니다. 고등학교 친구의 대학교 선배였던 지선 언니는 참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인데, 무뚝뚝해 보여도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사려 깊고 세심해서 누구든 그녀를 보면, 그녀를 좋아했다. 사석에서 농담처럼 꺼내놓은 고민이라 해도 흘려듣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평범한 대화 속에서 넌저시 알려주곤 했다. 마치, 차갑지만 따뜻한 이글루 같다. 펑펑 눈이 내려 모든 게 꽁꽁 얼어버린 계절이 찾아온 사람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황지선 언니는 로스쿨 수석입학자였던 현직 변호사다. 고모는 정신의학박사인 황은혜 박사인데, 최근 둘이 함께 마음을 치료하는 치유 연구소를 열었다고 했다. 은아는 김이분 할머니와 이곳을 한 번 방문해보고 싶었다. 점점 밝아지고 있는 김이분 할머니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까지 치유되었으면 했다. 이제, 할머니의 산책은 다친 마음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도는 산책이 아니었으면 했다.


은아의 계속된 설득으로, 김이분 할머니는 여행 삼아 대전에 있다는 치유 연구소를 가보기로 했다. 얼마 만에, 이 지역을 벗어나는가, 할머니는 새삼 감개무량했다.


꿈 치유 연구소는 주택가에 있는 집을 개조해 만든 곳이었다. 친구 집에 온양 부담 없어 좋았다. 황은혜 씨와 황지선 씨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녀들과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김이분 할머니는 편안함을 느꼈다. 향이 좋은 차와 간단한 주전부리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친구와 함께 있는 듯한 다정한 시간이었다. 느긋한 그녀들과 달리 속사포처럼 서둘러 말을 쏟아낸 쪽은 할머니였다. 그녀는 가슴속 깊이 맺힌 울혈을 모조리 토해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아는 사람이니, 힘들 때면 언제든 연락 주셔요. 꿈속이라도 괜찮으시면, 저희가 찾아갈게요."


헤어지면서 그녀들은 뜻 모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당장 그날, 꿈속에서 그녀들을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신기한 일이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지금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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