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 도망자와 추격자.
영화인 줄 알았다.
광활한 평원 위 도로를 달리는 SUV. 맞은편에서 미니밴이 달려온다. SUV는 그 앞을 가로막는다. 당황한 것 같은 운전자는 차를 정지했고, 이 사이에 SUV에서는 한 남자가 뛰어나와 미니밴 앞 문을 열어 운전자를 끌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동승자는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SUV에서 미니밴으로 갈아탄 이 남자는 도로 위를 쌩하니 달아났다. 미니밴에서 끌어내려진 여자 운전자와 조수석의 여자는 달아나는 자동차를 보고 뭐라 뭐라 소리를 질렀다.
두두두두 소리와 함께 헬기가 SUV를 따라갔다. 화면이 반으로 갈라지며 뉴스 진행자가 나왔다. 진행자는 마치 운동경기 중계하듯 범죄 현장 상황을 급박하게 중계했다. 범인이 타고 있었던 SUV는 주유소에서 탈취한 것이며, 그 안에는 4살 어린이가 타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갈라지면서 이번에는 메트로 덴버 지도가 나왔다. 지도의 도로들을 가리키며 현재 범인이 어느 도로를 달리고 있고, 그 근방 어느 어느 도로가 지금 폐쇄되어 통행을 할 수 없으니 그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했다. 다시 화면은 전환되어 차량을 쫓는 헬기가 촬영하는 장면이 보였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미니밴은 그냥 그 존재 만으로 위협적이었다. 드디어 화면에 경찰차의 모습이 나타났다. 경광등이 번쩍이는 경찰차가 미니밴을 쫓아갔다. 조금씩 범인과의 거리를 좁히는 경찰차, 곧 도망자가 잡힐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범인은 방향을 바꾸어 도심으로 가는 도로로 진입했다. 잘못하면 출근 시간 차량들과도 맞닥뜨릴 수 있어 보였다. 빨리 경찰이 잡지 못한다면 아침 출근길 도로가 괜찮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도심으로 가는 길이니 교차로가 많아지고 점점 차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도로 폐쇄를 했지만 미처 진입했던 차량까지는 어떡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망자의 차량은 처음 맞닥뜨린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다. 그다음 교차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 번째 교차로에서는 빨간 신호등으로 인해 정지선 앞에 정지한 차량이 있었다. 도망자는 그 차량 옆을 다 긁고 앞으로 지나가면서 유턴을 했다. 그리고 바로 앞의 차량 앞에 서더니 놀라서 정지한 운전자를 끌어내리고 그 차에 탔다. 운전자는 길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금세 일어나 자신의 차를 쫓아가며 차 문을 잡고 뛰면서 차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도망자는 속도를 냈고, 운전자는 길에 나뒹굴었다. 많이 다쳤을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도망자는 속도를 올려 달렸다. 사방에서 경찰차들이 도망자 차량을 에워싸듯 쫓아왔다. 경찰차는 도망자 차량 바로 옆에서 정지하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도망자는 서지 않았고, 속도를 내다가 결국 앞에서 달려온 경찰차와 다른 차량들에 부딪히고 나서야 정지했다. 휴, 이제 잡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포기를 몰랐던 도망자가 차 문을 열고 내려 뛰어 도망을 쳤다. 경찰들도 모두 도망자를 따라갔다. 이제 더 이상 화면에서 도망자는 보이지 않았고, 경찰들도 이내 사라졌다. 잡을 수 있겠지? 잡을 거야..
앞에 묘사한 이 추격씬은 영화가 아니다. 게임도 아니다. 2014년 어느 날 아침의 실제 뉴스 상황이다. 아침마다 TV를 틀어놓고 애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 준비를 했던 나는 이 날 아침도 여느 때와 같이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뉴스가 속보로 뜨면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모든 사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 나서 집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운전자들의 차량들을 빼앗아 달아나는 모습들을 보며 도저히 집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 덴버 외곽이었지만 범인은 덴버의 동쪽 편에서부터 오고 있었고 우리 집은 덴버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십여분 후, 뉴스에서는 범인을 검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쇼킹했다. 미국에 온 지 몇 달만에 보게 된 생생한 사건에 하루 종일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애니메이션 속 야생의 세계 속에 떨어진 나약한 초식동물 같았다. 웰메이드 안전 지킴 망이 있던 사파리에 살다가 넓디넓은 초원에 우연히 떨어져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초식동물. 물론 이곳도 나름의 질서가 있고 대체로 잘 지켜지기는 하지만 너무나 거대하고 광활해서 사회적 안전의 손길이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곳으로 내가 살러 왔구나…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이 범인은 나중에 160년의 징역을 구형받았다. 저지른 범죄의 규모나 피해에 맞는 시원한(?) 형량이라 생각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이미 벌어졌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조금은 헐겁고 느슨하며 복불복인 사회안전망 속에 범인에 대한 처벌은 확실하게 하는 듯 보이는 모순의 사회. 어차피 완벽한 나라가 없으니 선택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