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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봄 Apr 01. 2024

자꾸 생각나고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

“심심한데 우리 만화방 갈래?”

“만화방이 뭐하는 곳인데?”

“만화책 읽는 데지! 진짜 재밌는 책 많아. 같이 가자~!”


열 넷의 가을, 단발머리에 웃으면 누운 초승달처럼 눈이 예뻤던 J를 따라 처음 만화방에 갔다. 


‘어쩜 이렇게 재밌는 책이 있을까?’


놀라움과 충격에 빠진 그 날 이후, '만화책'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손녀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엄마 몰래 챙겨주신 할머니의 쌈지돈은 대부분 만화책을 읽느라 탕진했다. 김영숙, 한유랑, 황미리, 전영희, 나하란….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한 작가들의 웬만한 책을 다 읽은 후 황미나, 신일숙, 강경옥, 이미라, 한승연, 김동화, 천계영 등 내노라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만화책 사랑은 대학 졸업까지 10여년간 쭉 이어졌다. 심지어 대학 1학년 '대중문화' 수업과제로 낸 리포트도 만화작가 연구였고, 만화방 문지방을 하도 드나드는 통에 가게를 정리하는 날 주인 아저씨께 원하는 책이 있으면 마음껏 가져가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다. 그 날 한아름 싸온 만화책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었는데 그런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의 구박에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고 한 권도 남지 않았다.


'고난에 꺾일쏘냐!' 

끈질긴 만화 주인공처럼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만화책을 샀다. 사고 버리고를 반복한 긴 세월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몇 권의 책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김혜린 작가의 『불의 검』

김진 작가의 『헤이, 튜즈데이』『어떤 새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김영숙 작가의 『죠슈아』

아소우 미코토 작가의 『GO! 히로미 GO!』

타무라 유미 작가의 『바사라』


이 중 특히 좋아하는 건 김혜린 작가와 김진 작가의 작품.

내게 그 어떤 문학보다 감동을 안겨준 만화책으로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읽고 나면 꼭 눈물꼭지가 터진다는 게 난감한 대목이지만 다시 읽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한참동안 멍해진다.


제일 좋아했던 만화책 |  만화책 속에서 오래 전 친구에게 받은 엽서를 발견했다!!


제목이 ‘자꾸 생각나고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인데 왜 슬퍼지는 책을 꼽았는지 의아할 지도 모르겠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즐거움과 슬픔은 등을 맞대고 있다 말하면 답이 될까?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 속 주인공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든 결국 해낸다.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귀결되는 결말에 안심하며 삶을 가치롭게 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어둔 밤 길을 잃지 않게 비추던 등대처럼 반짝 힘을 주던 무언가가 자주 마음에 불을 밝혔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던 장면, <GO! 히로미 GO!> 2권 




첫사랑처럼 만화책을 사랑하던 마음은 그림책과 글쓰기로 옮아갔다. 자꾸 읽으면 쓰고 싶어진다던 말은 적어도 내겐 옳았다. 타인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가 상상하는 즐거움은 그대로지만 이젠 내 안에 잠든 이야기를 길어올리는데 조금 더 힘을 쏟는다. 펼치기만 하면 금세 이야기를 들려주던 만화책과 달리 나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머물러야 겨우 한 줄, 두 줄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끈질기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만화책 덕후였던 과거 덕분에 기다리는 건 자신있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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