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재주가 하나 있다.
걸리적거리는 무엇도 없는데 무릎을 꺾고 넘어지는 재주, 평소엔 부끄러움을 뒤로한 채 일어서면 그만인 해프닝인데 그 해는 달랐다. 인생이란 마라톤은 종종 우리를 내두른다. 몇 번의 도랑과 늪, 소나기와 우박을 맞았지만 일어나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간절하게 바랐던 아이를 만났고 무탈하게 자라 막 15개월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생명의 성장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 해 봄, 제주로 가던 커다란 배의 침몰소식을 들었다. 귀를 의심하며 종일 뉴스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전원구조'라는 보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이어진 오보소식에 한참 동안 멍하니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온 나라가 커다란 슬픔에 빠져 휘청이던 날들이었다. 특히 팽목항에 자리를 펴고 연일 구조소식을 기다리던 세월호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자주 눈물을 훔쳤다. 겨우 한 해를 키우고도 아이가 다칠까 마음 졸이는데 열일곱 해를 키운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슬픈 봄이었다.
팽목항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둘째를 품었다. 큰 아이보다 조금 수월하게 찾아온 것도 잠시, 입덧이 심해 한 달을 누워 지냈다. 죽을 것 같던 입덧도 17개월이 되니 잦아들었고, 안심해도 된다는 주치의의 말에 육아로 지친 심신을 달랠 겸 세부로 태교여행을 준비했다. 빛의 속도로 항공권, 교통편, 숙소, 일정에 필요한 예약을 마쳤고, 마지막 짐만 꾸리면 다음 주는 세부에서 아침을 맞을 터였다.
여행의 설렘으로 들뜬 토요일, 오전부터 윗배가 콕콕 쑤시더니 찌릿찌릿 아팠다. 임신 중이라 병원을 찾을 생각도 않고 견뎠는데 오후가 되니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자정 무렵까지 버티다 급기야 일어서기조차 힘들어 응급실에 실려갔다. 병실 가득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급성 충수염이 터져 복막염이 진행 중이에요.
게다가 진통이 진행되어 아이가 막달까지 내려왔어요.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산모도 아이도 모두 위험해요."
연이은 마취와 수술, 희미한 의식을 부여잡고 물었다.
"선생님, 아이는 괜찮을까요?"
"우선은... 환자 수술이 급해요."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수술 후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태아가 더는 내려오지 않게 버텨야 했다. 고강도 자궁수축 억제제를 맞으며 견디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입원 첫 주, 다니던 여성병원 간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산모님, 양수 검사결과가 정상으로 나오셨어요. 축하드려요."
환하게 웃으며 소식을 전하는 간호사에게 더듬더듬 상황을 알렸다. 침묵, 전화기 저편에서 위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여행사에 취소문자를 보낼 때도 뭣하러 여행 같은 걸 잡은 걸까 자책했다. 무거운 돌덩이에 몸이 바스러지던 감각이 온 힘으로 나를 짓눌렀지만 아이만 무사하다면 괜찮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해 가을, 아이와 영영 이별했다.
내게 2014년은 수많은 죽음 곁에 아이의 죽음을 놓아둔 해였다. 이제까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 같았다. 넘어져도 일어서면 그뿐이라며 순진하게 말하던 내가 부끄러웠고, 나라는 렌즈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며 평가하는 말들이 얼마나 아픈지 알았다. 넘지 못할 산도, 일어서지 못할 불행도 있다는 걸 배웠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불안했는데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너무 이상하고 미안했다.
세월호와 아이의 죽음, 그래서 더 아픈 4월이다. 모두 살아 있다면 스물일곱, 열 살이 되었을 아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지키지 못해 미안한데 그 말조차 할 자격이 있는 건가 되묻는다. 살릴 수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한 고운 아이들의 영혼이 평안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