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데 우리 만화방 갈래?”
“만화방이 뭐하는 곳인데?”
“만화책 읽는 데지! 진짜 재밌는 책 많아. 같이 가자~!”
열 넷의 가을, 단발머리에 웃으면 누운 초승달처럼 눈이 예뻤던 J를 따라 처음 만화방에 갔다.
‘어쩜 이렇게 재밌는 책이 있을까?’
놀라움과 충격에 빠진 그 날 이후, '만화책'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손녀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엄마 몰래 챙겨주신 할머니의 쌈지돈은 대부분 만화책을 읽느라 탕진했다. 김영숙, 한유랑, 황미리, 전영희, 나하란….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한 작가들의 웬만한 책을 다 읽은 후 황미나, 신일숙, 강경옥, 이미라, 한승연, 김동화, 천계영 등 내노라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만화책 사랑은 대학 졸업까지 10여년간 쭉 이어졌다. 심지어 대학 1학년 '대중문화' 수업과제로 낸 리포트도 만화작가 연구였고, 만화방 문지방을 하도 드나드는 통에 가게를 정리하는 날 주인 아저씨께 원하는 책이 있으면 마음껏 가져가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다. 그 날 한아름 싸온 만화책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었는데 그런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의 구박에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고 한 권도 남지 않았다.
'고난에 꺾일쏘냐!'
끈질긴 만화 주인공처럼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만화책을 샀다. 사고 버리고를 반복한 긴 세월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몇 권의 책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김혜린 작가의 『불의 검』
김진 작가의 『헤이, 튜즈데이』『어떤 새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김영숙 작가의 『죠슈아』
아소우 미코토 작가의 『GO! 히로미 GO!』
타무라 유미 작가의 『바사라』
이 중 특히 좋아하는 건 김혜린 작가와 김진 작가의 작품.
내게 그 어떤 문학보다 감동을 안겨준 만화책으로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읽고 나면 꼭 눈물꼭지가 터진다는 게 난감한 대목이지만 다시 읽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한참동안 멍해진다.
제목이 ‘자꾸 생각나고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인데 왜 슬퍼지는 책을 꼽았는지 의아할 지도 모르겠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즐거움과 슬픔은 등을 맞대고 있다 말하면 답이 될까?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 속 주인공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든 결국 해낸다.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귀결되는 결말에 안심하며 삶을 가치롭게 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어둔 밤 길을 잃지 않게 비추던 등대처럼 반짝 힘을 주던 무언가가 자주 마음에 불을 밝혔다.
첫사랑처럼 만화책을 사랑하던 마음은 그림책과 글쓰기로 옮아갔다. 자꾸 읽으면 쓰고 싶어진다던 말은 적어도 내겐 옳았다. 타인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가 상상하는 즐거움은 그대로지만 이젠 내 안에 잠든 이야기를 길어올리는데 조금 더 힘을 쏟는다. 펼치기만 하면 금세 이야기를 들려주던 만화책과 달리 나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머물러야 겨우 한 줄, 두 줄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끈질기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만화책 덕후였던 과거 덕분에 기다리는 건 자신있다. 정말이지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