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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Apr 02. 2021

역사탐방에세이 4화

 정조 건릉 -운명과 의지 사이에서

     융릉에서 오른쪽 산책로를 걸어 건릉을 가기로 했다. 조금 걸어 들어갔더니 안내판이 하나 서 있었다. 정조가 처음 묻혔던 초장지에 관한 것이었다. 융릉과 무척 가깝다.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또 그 자리에 서서 영화 <사도>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수원 행궁에서 열었던 것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굳이 이곳 현륭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연 까닭이 있었을까? 혹시 어머니 회갑연을 핑계로 아버지에게 바치는 회갑연은 아니었을까?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와 동갑이었다. 무덤에서 정자각까지도 힘들게 내려오실까 염려한 아들이라면, 차라리 살아있는 어머니를 아버지 무덤 곁으로 모시고 가서 회갑연을 열어드리는 것을 택했을지도…….

정조대왕의 초장지 안내판

   답사에 나선 우리 셋 다 세종과 정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정조가 묻힌 건릉을 향해 걸어가며 정조와 세종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종이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면,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 세종도 성군이요, 정조도 성군이었다. 22세에 왕위에 오른 세종이나 25세에 왕위에 오른 정조나 엇비슷한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결정적인 것은 ‘아버지’였다. 세종에게는 악역을 자처하면서 아들이 성군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놓아준 아버지 태종이 있었지만, 정조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 오히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기에 어린 아들의 안위마저도 위태롭게 만들고 갔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을 어린 소년 이산은 시시때때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핍박과 배척, 암살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할아버지 영조는 팥죽 끓듯 하는 성미였고, 노론은 장차 어린 소년이 왕이 되면 아버지의 복수라도 행할까 염려하여 아예 제거하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평소 노론은 "동궁은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三不必知) 라며 이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부정해 왔다. 세 가지란 노론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너는 역적의 아들이요 죄인의 아들이니 왕위는 넘보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어린 소년이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마침내 1776년 3월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조는 화성이 완성되면 후일 순조가 되는 아들이 열다섯이 되는 1804년 아예 화성에 내려와 자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정조도 세종이 부러웠던 것일까. 태종 이방원이 아들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아 아들 세종이 성군으로 성장하는 것을 뒷받침했던 것처럼, 자신도 아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조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는 염원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그후 조선왕조가 걸었던 길을 생각할 때에 너무나,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 순조가 고작 11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건릉가는 길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조에게는 아버지 복만 없었던 게 아니라 자식 복도 없었다. 세종에게는 18남 4녀의 자식들이 있었다. 정비인 소헌왕후 소생만 8남 2녀였다. 그러나 정조는 정비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한 살 아래인 효의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효의왕후의 고모할머니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다. 영조는 적장자를 낳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숙종의 모후와 같은 집안의 딸로 손자며느리를 간택하였다고 한다. <한중록>을 읽어보니, 사도세자도 효의왕후를 며느리감으로 점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효의왕후는 26세가 되도록 임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정조는 후궁을 들이지 않고 기다렸다고 한다. 정조가 27세가 되도록 후사가 없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명을 내려 후궁을 들였다. 삼간택과 가례의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 빈으로 입궁하는 후궁들이었다.    



건릉 



   정조는 의빈 성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의빈 성씨는 간택을 하고 정식으로 들어온 후궁은 아니었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친정집에서 데리고 온 나인이었는데,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이라고 한다. 드라마 <이산>은 정조와 의빈 성씨와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의빈 성씨는 두 번의 유산 끝에 옹주를 낳고 옹주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아들을 낳았다. 후계자를 얻게 된 정조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정조는 아직 효의왕후가 젊으니 더 기다려 보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살밖에 안 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 아들이 바로 문효세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효세자는 다섯 살에 홍역을 앓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정조도 효의왕후도 의빈 성씨도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정조도 정조이지만, 다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효의왕후 또한 마음고생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효의왕후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임신을 하는 소동을 일으킨다. 

  내가 ‘임신 소동’이라고 하는 이유는 진짜 임신이 아니고 상상임신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산실청’이 설치되어 출산을 기다렸다. 산실청은 왕비가 임신하여 산달이 가까워지면, 왕비의 출산을 돕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을 말한다. 1787년 9월에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에 산실청이 설치되었다. 임신 말기에 산모들이 순산을 위해 복용하는 약들도 처방받아 복용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다음 해 12월이 되어도 태아는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산실청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상상임신이다. 

  상상임신을 하면 실제로 임신한 것과 같은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생리가 끊기고 입덧을 하고, 심지어 배도 불러온다고 한다. 상상임신은 임신을 간절히 원하거나 임신에 대한 지나친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의하여 나타나는 정신과적 질병이다. 효의왕후가 느꼈을 압박감이 얼마나 컸던지를 말해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여자들이 일찍 결혼하고 일찍 출산했던 당시에 34, 35세면 며느리를 볼 나이였다. 그 나이에 상상임신 소동이나 일으켰으니, 말 많은 궁궐에서 얼마나 입방아들을 찧었겠는가. 부끄럽고 참담하였을 것이다. 정신적 충격이 컸을 텐데, 어찌 극복하였을까.      

 

  1790년 6월에 드디어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바로 순조다. 왕실 관례에 의해 순조는 효의왕후의 아들로 입적이 되었다. 자기 몸을 빌려 낳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효의왕후는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살얼음판을 걸을 때, 혜경궁 홍씨는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세손빈 손을 잡고, ‘사방에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뿐이니, 세손과 세손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특히 세손을 동무처럼 아껴 주라’고 당부했다. 혜경궁 홍씨의 가르침을 받은 정조와 효의왕후는 역대 어느 왕과 왕비들보다 부부애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누구보다 불굴의 의지로 살았던 정조였으나,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이 사람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삼신할매는 어디서 무엇하고 있었던고. 세종에게 넘치듯 주었던 아들 복을 정조에게도 조금 주시지, 에고. 부질없는 소리겠지만, 나란히 합장묘 형태로 누운 정조와 효의왕후를 앞에 두고, 안타까운 마음에 중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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