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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r 22. 2021

역사탐방에세이 2화

 세종 영릉(英陵)과 신륵사  -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첫 답사지로 영릉을 선택한 것은 지호맘이 사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다. 지호맘은 자기가 사는 곳과 가깝고, 우리에게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자를 만들어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먼저 가보자고 했다. 영릉과 가까운 신륵사도 탐방하는 게 어떻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11시 30분에 세종대왕릉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찬맘과 나는 지하철 3호선으로 가다 양재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타고 판교역에서 다시 경강선으로 갈아타서 세종대왕릉역에 내렸다. 지호맘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영릉 가는 버스가 금방 지났다고 해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세종대왕릉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탔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다시 와야지 하지 말고, 눈에 잘 담고 가자고 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 영릉을 향해 가다 보니, 세종대왕 재위 중에 발명한 발명품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속 천문학 이야기’라는 특강이 열렸었는데, 참으로 어려워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앉아있었던 기억이 났다.      

  

   영릉을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세종대왕보다는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위대한 왕의 첫째 자리에 있는 분이다. 후대 왕들은 툭하면 “전하, 세종대왕을 본받으소서.” 하는 소리를 지겹게 들어야 했다. 만 원짜리 지폐로, 광화문 광장 동상으로, 세종시라는 행정수도의 이름으로, 날마다 대하는 분이라 다들 잘 알고 있고, 굳이 더 보탤 말도 필요 없을 정도다. 위대한 왕의 비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그러나 역사가 기록해 놓은 사건들을 통해 근사하기만 했던 삶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대한 왕의 배우자로 본인 역시 후대 왕후들의 모범이 되었던 소헌왕후 심씨. 그림자 내조를 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했지만, 죽을 때까지도 복권되지 않은 친정 가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친정의 몰락이 왕후의 자리와 맞바꾼 거라 더 그랬을 것이다. 

영릉 입구


   소헌왕후 심씨는 열네 살 때, 두 살 아래인 당시 충녕군이라 불리던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 이도와 혼인을 하였다. 친정은 명문가로 할아버지 심덕부와 아버지 심온은 개국공신이었고, 숙모가 태조 이성계의 딸이요 태종 이방원의 동복 누이동생인 경선공주였다. 충녕군과 결혼하게 된 것도 경선공주가 적극적으로 밀어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대군의 부인으로 사는 삶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왕자에게 하사되는 집과 전답 노비들만 해도 평생 떵떵거리며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거듭되는 비행으로 말미암아 세자위가 흔들리자 세자빈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충녕대군으로 하여금 양녕대군의 비행을 태종에게 일러바치게 한다던가, 친정아버지에게 양녕대군의 폐세자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둘째인 효령대군이 아니라 셋째인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도록 대신들을 충녕대군 편에 서게 만드는 작업을 부탁한다던가 하는 일련의 일들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의구심이 든다. 시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정 가문이 외척 척결의 의지를 가졌던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었던가. 시어머니의 친정 가문과 본인의 친정 가문을 별개로 생각했거나, 본인의 친정 가문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앞섰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저것 헤아리고 계산하기에는 너무 어렸거나, 왕비에 대한 욕심이 앞섰거나…….

   남편이 왕이 되고, 친정아버지가 영의정에 제수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태종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을 것이다. 태종은 자신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처남들을 일거에 제거해 버린 사람이다. 외척이 득세하여 왕권을 흔들까 염려하여 미리 정지작업을 한 것이다. 본인의 처가를 멸문지화 시킨 사람이 아들의 처가는 가만둘까.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지 두 달 만에 양위하여 상왕 자리로 물러나면서도 병권과 인사권은 본인이 쥐었다.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 심온을 영의정에 제수하여 명나라 사은사로 보내고 나서 강상은의 옥사를 일으켰다. 강상은은 태종이 임금에 오르기 전부터 사가에서 거느리고 있던 종이었다. 무예 실력이 뛰어난 그를 신임하여 내금위장으로 승진시켰고, 세종이 즉위한 후에는 병조참판의 지위에 앉혔다. 태종이 병권을 행사하기 위해 심어놓은 심복이었다. 태종은 강상인이 군사에 관한 일을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이 직접 취조 방향을 이끌었다. 군사에 대한 보고를 태종에게 하거나 세종에게 하거나 실제가 달라지는 없을 텐데도, 뼈가 부서지는 압슬형을 가하며 압박했다. 강상인으로서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강상인의 입에서 영의정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어서야, 태종은 옥사의 진실이 밝혀졌다면서 크게 기뻐했다. 심복 중의 심복인 강상인을 모질게 고문하면서까지 얻어낸 이름 심온, 그것으로 소헌왕후의 친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태종은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심온을 의주에서 납치하다시피 하여 제대로 심문도 거치지 않고 옥사의 수괴로 몰아 처형해 버렸다. 한양에 들어오지도 못한 심온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사사되었다. 거열형을 당한 강상인도 사사된 심온도 태종이 그린 큰 그림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심온의 처를 비롯한 부녀자들은 변방의 관노비가 되어 흩어졌다. 소헌왕후 심씨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피를 토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어머니인 원경왕후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소헌왕후는 원경왕후처럼 대놓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자신을 폐비시킨다는 말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세종과의 사이에 이미 3남 1녀의 자식을 낳았지만, 시아버지 태종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소헌왕후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태종은 문안을 드리러 간 소헌왕후에게 대놓고 자신을 원망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소헌왕후는 태종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신의 친정 아비는 죄인이옵니다. 신첩은 출가외인이라 오래전부터 상왕 전하를 친가의 아버님으로 여기고 있사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무서운 시아버지 태종의 서늘한 눈빛을 바라보며 얼마나 두려웠을까. 폐비가 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속으로는 덜덜 떨면서도 겉으로는 미소짓는 소헌왕후의 모습이 그려진다. 폐비 되는 신세야 면했지만, 왕후와 맞바꾼 친정의 몰락으로 인한 죄책감과 참담함이 그녀의 남은 생을 지배했을 것이다. 향년 52세로 눈을 감은 소헌왕후 심씨는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처럼 말년에는 불교에 의지하여 마음을 달랬다.      

  

영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종대왕 부부의 능인 영릉 바로 앞에 왔다. 영릉은 조선 왕릉 최초의 합장묘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두 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안치하였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가 들어오고 나갈 때 일어서서 예를 갖출 정도로 매우 공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둘 사이에 8남 2녀를 낳았을 정도로 부부 사이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합장묘가 어울리기는 하다. 세종은 태종이 죽고 많은 시간이 흘러도 끝끝내 장인을 복권 시키지 않았다. 아버지인 태종에 대한 의리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세종의 깊은 속뜻은 모르겠다. 소헌왕후 역시 친정아버지를 복권 시켜 달라고 남편을 닦달하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장모도 태종이 죽고 5년이 지나서야 관노비에서 면천 시켜 주었다. 심온은 소헌왕후가 죽고 세종도 죽고 외손자인 문종이 즉위한 후에야 복권되었다. 

   소헌왕후에게 꽃피는 봄날은 스물셋에 왕후가 될 때까지 아니었을까. 조선 최고 성군의 정비로 살았지만, 나는 그녀의 삶이 무척 신산하게 느껴져 안타까웠다. 그녀 사후이기는 하지만, 아들 수양대군에 의해 또 다른 아들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그리고 손자인 단종이 죽임을 당했다. 혼이 있어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자신이 낳은 또 다른 아들들과 금쪽같은 손자를 죽인 것을 알았다면, 어찌 무덤에 편히 누워 안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신산한 사람. 세종대왕을 잘 내조해 위대한 시대를 열었던 사람. 그녀의 무덤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여주까지 온 김에 신륵사를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영릉을 나왔다. 마침 버스가 오고 있어 달려가 탔다. 버스 기사에게 신륵사를 가려고 한다고 하니, 여주 오일장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라고 하면서 내려주었다. 신륵사 가는 버스를 타면서 여주 팔경 중의 으뜸이라는 신륵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가서 보니 왜 여주 팔경 중의 으뜸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강을 끼고 있는 오래된 사찰이었다.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강을 끼고 있어 이색적이었다. 중국 일본 한국 통틀어 강을 끼고 세운 사찰 중 유일하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독특한 사찰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그럼 대체 얼마나 오래된 사찰이란 말인가. 그리고 원효대사는 얼마나 많은 절의 창건을 주도했단 말인가.      

  

신륵사를 끼고 흐르는 남한강


  극락보전 옆으로 계단을 올라갔더니, 보제존자 석종이 나왔다. 앞에 세워둔 표지판을 읽으니 나옹선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옹선사라면 무학대사의 스승이 아닌가. 나옹선사는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었는데, 왕명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다가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되었다. 이곳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여 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나는 불교적 지식이 없어서 나옹선사가 남긴 불교적 가르침보다 그가 썼다고 알려진 ‘청산은 나를 보고’가 생각났다. 셋이서 기억을 더듬어 한 구절 한 구절 시를 읊으며 나옹선사의 다비식이 열렸다는 장소를 찾아 내려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영릉에서 소헌왕후를 생각하며 안타까웠던 감정이 다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나옹선사의 시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과연 탐욕도 성냄도 번뇌도 욕심도 없는 삶이 가능할까. 물같이 바람같이 살고 싶은데, 벗어버리지 못해서 어제도 오늘도 번뇌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영릉에서 지호맘이 가지고 온 떡으로 간식을 먹어서, 점심은 신륵사까지 다 둘러본 후에 먹기로 했다. 3시가 넘은 시간에야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배고파서 그랬는지 밥맛이 엄청 좋았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사랑과 미움과 성냄과 탐욕이 있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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