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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Apr 01. 2021

역사탐방에세이 3화

융릉  - 미움받은 아들, 사도세자


   1호선 병점역 후문에서 35번 버스를 갈아타고 융건릉을 향했다. 27년 전에 한 번 왔던  곳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그때와는 주변이 많이 바뀌었다. 하기는 강산이 세 번쯤 바뀔 시간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의 무덤이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묘, 원, 그리고 능을 모두 거친 조선 유일의 왕릉이다. 1762년 28세의 나이에 죄인의 신분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이 처음 자리했던 곳은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이었다. 폐서인이 되어 죽었기 때문에, 왕세자의 무덤에 붙이는 ‘원’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묘(수은묘)’로 있었다. 

  1776년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은 왕위에 오른 첫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鳴呼, 寡人思悼之子也).”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선언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폐서인이 되었기에, 영조의 큰아들로 병으로 10세에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서 이어받은 왕위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신하들에게 하는 선전포고와 같은 거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1789년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이라 부르게 했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담아서 지은 이름이었다. ‘현륭원’이란 묘명에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현부에게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융릉에는 다른 능과 달리 능의 꼭대기에서 제를 지내는 정자각까지의 경사진 언덕에 계단처럼 평평한 곳이 조성되어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굶어 죽었기 때문에 능에서 정자각까지 오려면 힘들 것이라 여겨 중간에 쉼터를 마련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 답사 목적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융릉가는 길

          

융릉 전경

  

  

무덤과 정자각 사이 언덕에 놓인 쉬는 공간


   얼핏 보기에도 사도세자의 무덤과 정자각 사이의 언덕의 경사도는 완만하고 거리도 짧아 보인다. 그런데도 중간에 평탄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 마치 앉아서 쉬었다 내려오라고 하는 것만 같다.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을 켜고 사진을 찍는데 울컥 목이 메었다. 예전에도 어디선가 이 사연을 읽고 눈물이 났던 적이 있는데, 막상 눈으로 보고 사진을 찍으니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마음이 어땠는지 감히 느껴져 더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미웠으면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을까?” 지호맘은 융릉을 둘러보는 내내 그런 말을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잔인해. 잔인해. 차라리 칼로 베여죽이거나 사약을 먹여서 죽이지.”

  지호맘은 사도세자가 갇혀있던 뒤주를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직도 화가 난다고 했다. 스물여덟 청년이 들어가 있기에는 너무 작아 몸을 포개듯 앉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런 형벌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영조를 힐난했다. 영조의 나이 69세에 벌어진 일이니 당시 영조가 노망이 났던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도 했다. 아들을 뒤주에 가두라는 영을 내리고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신하들은 영조가 무서워 세자를 꺼내야 한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 시간이 흘러 그런 비극이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지호맘 말고도 여럿 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게라도 믿고 싶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서 굶어 죽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와 같은 예가 또 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조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영조의 비망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게 없으니 역사의 기록들과 추측만 가능하다. 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죽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이미 영조에게 화가 난 지호맘에게는 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호맘에게서 답사하고 온 다음 날에도 왼 종일 사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메시지가 왔다. 사도세자의 고통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다며,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다며, 그냥 죽였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건 너무나 비인간적인 죽음이었다며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네 개나 보내왔다.      

  

   사도세자는 미움받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조가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영조는 즉위 이전인 1719년 정빈 이씨에게서 첫 아들 효장세자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영조 나이 42세(영조 11년, 1735년)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당시 42세면 손자를 볼 나이였다. 영조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늙은 아버지 영조의 기쁨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원자로 정호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된 사례다.  


    <승정원일기 영조 13년(1737년)>에 의하면 영조는 “세자는 너무 뚱뚱하기 때문에 병이 자주 생기는 것 같다.”고 하며 어린 세자의 비대한 몸집과 그로 인해 쉽게 병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영조의 걱정은 나날이 늘어갔다. 

 “지난번에 세자를 보니 팔뚝에 살찐 것이 나보다 더 하더라.”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하여 근래 듣기에 앵도를 두 접시나 먹어치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매번 내관에게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확인해볼 걸 그랬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대왕대비께서 세자의 음식 절제를 싫어하여 과식을 보고만 있으니 마음이 항상 불편했다. 세자의 마음은 전혀 불편함이 없고 또 잘 먹어대니 어찌 살이 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자가 숨을 쉴 때 들리는 소리가 마치 바람소리 같더라. 너무 살이 쪄서 그런 것 같다.”    

  잘못된 식습관을 갖게 한 것에 대한 후회, 세자의 비만과 그로 인한 건강 악화에 대한 걱정이 날로 늘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 20년(1744년) 기록에 의하면 “세자가 근래 식사량이 많이 늘어 살이 많이 찌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다.”고 토로한다.  

  “세자는 식사량이 너무 많고 식탐을 억제하지 못해 뚱뚱함이 심해지고 배가 나와 열 살의 아이 같지 않다.”

  “세자가 뚱뚱해서 더위 견디는 걸 힘들어하고 걸음걸이 역시 심하게 더디고 늦으니 이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날 뿐이다.”

  “음식을 좋아해서 정말 답답하다. 식탐을 조절하지 않으니 날로 살찔 뿐이다.”

   “세자의 두드러기 증상은 오랜 시간 누적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이는 분명히 뚱뚱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글을 이해하는 이치는 자못 뛰어난데 뚱뚱해서 얼굴 생김새가 별로라 답답할 뿐이다.”

   아들의 비만과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던 아버지의 어조가 흉을 보거나 나무라는 투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하게 된 계기가 사도세자의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식을 외모만 가지고 미워했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좀 부족하고, 그보다는 더 본질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10세 무렵인 영조 20년 즈음부터 무예나 잡학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경전 공부에는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이를 눈치챈 영조가 사도세자의 경전 공부에 대한 태도를 떠보는 장면이 ‘영조실록’에 나온다. 

   영조가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망설이면서 “싫을 때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세자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의 이 말은 진심이 아니다. 곧바로 영조는 세자에게 하루 동안 글을 읽는 것이 좋을 때는 흰콩을 놓고, 싫을 때는 검은콩을 놓아서 그 많고 적음을 강론하는 관원에게 검사받게 하였다. 또 세자를 모시는 관리에게도 “세자가 경전 공부를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여 강제로라도 경전 공부를 좋아하도록 만들려는 의지를 내보였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경전 공부에 힘쓰며 절제하는 생활을 기대했는데, 사도세자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경전 공부에 게으르며 무절제한 식욕을 드러냈고 또 그에 따르는 병치레를 하였으니, 영조로서는 몹시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평소 군복을 즐겨 입었으며, 홍역에 걸렸을 때도 세자빈에게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런 아들의 무골을 감지한 영조는 1743년(영조 19년) 형조판서 이종성을 세자시강원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보필해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성이 차지 않은 듯 세자가 13세 때 어전으로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중국의 한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문제가 훌륭합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를 속이려 하느냐? 네가 지은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구절이 있어 기가 매우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대화 속에서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이 엿보인다. 

   영조는 일찍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자가 무예나 술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1755년(영조 31년) 9월 10일에 이렇게 세자를 다그쳤다.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해 그믐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召對)하고 어느 날에는 차대(次對)했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書筵)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公事)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강관(講官)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

 

   글만 열심히 읽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와 강권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학문과 더불어 무예에 심취하여 15세 무렵에는 효종이 쓰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가 되었다. 아울러 궁술과 승마에도 일가견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24세 때인 1759년(영조 35년)에 <무기신식>이라는 무예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은 그림과 설명을 붙인 무예서이다. 이 책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고,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영조는 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자에게 불만을 품었고, 시시때때로 양위선언을 통하여 그를 괴롭혔다. 봉건시대에 건강한 군주의 양위선언은 정국을 전환하기 위한 자극적인 시도이다. 임금이 양위를 선언하면 당사자인 세자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만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장차 불충으로 규정되어 어떤 징벌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임금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지만 당하는 세자나 신하들은 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리청정 이전에도 영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양위선언을 했다. 어린 세자는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결정의 철회를 애원했다. 그런데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뒤에도 세 차례나 양위를 선언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세자가 겪어야 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리청정 3년째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가 양위선언이 떨어지자 세자는 야반삼경에 뜰에 엎드려 석고대죄했다. 2년 뒤인 1754년(영조 3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사간 신위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때 영조는 세자를 불러들인 다음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며 다그치며 양위선언을 하여 세자를 괴롭혔다.

  2년 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조의 변덕에 견디다 못한 세자는 자신이 불초하고 불민한 사람이라며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 더욱 학문에 몰두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겠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바쳤다. 한데 승정원을 통해 그 글을 읽은 영조는 또다시 양위파동을 일으켰다. 보다 못한 홍봉한 등의 중신들이 세자를 변호했을 정도였다.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홍봉한은 동궁이 평소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한다며 임금을 달랬다. 과연 이날 밤에도 세자는 눈물로 결정의 유보를 통촉하더니, 물러 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버렸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당시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쯤 되면 부자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 없었다. 


  세자의 정신질환은 1755년(영조 3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18세 무렵 장인 홍봉한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원래 내게 울화증이 있는데, 최근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미칠 듯이 답답합니다. 이런 증세를 어찌 의관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비방을 알고 있다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십시오.’

 

  사도세자의 비였던 혜경궁 홍씨는 세자가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의대증에 시달렸다고 <한중록>에서 밝혔다. 그것은 물론 세자가 부왕을 만나기 싫어서 생겨난 증세였다. 세자는 수시로 정신질환이 발작되었고,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는 몹시 후회했다. 그때마다 부왕이 엄히 책망하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대리청정을 놓지 않았던 세자는 홍봉한에게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이런 세자의 관심은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 노론 당료와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 왕실 세력의 무고로 인해 영조의 비위만 뒤틀리게 했다.

  그렇듯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는 광증에 걸린 천재들이 그렇듯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1760년경부터 그는 여러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761년에는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른다. 그쯤 되니 생모인 영빈 이씨나 아내 혜경궁 홍씨는 도저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1762년 영조 38년 음력으로 윤달 5월 13일. 당시 열한 살이었던 세손 이산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해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하지 못했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했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해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 권99, 영조 38년 윤 5월 13일      


   영조와 사도세자, 이 부자의 관계는 오늘날의 부모 자식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버지의 강박증이 아들을 어떻게 인도하는지 보여준 실례이며, 스트레스가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준 표본이다. 무엇이 진정 자식을 위하는 길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손흥민에게 축구 대신 서울대 법대를 가라고 윽박질렀다면? 사도세자의 비극은 아버지의 욕심이 만든 참사였다고 생각한다. 아들의 날개 밑으로 손을 넣어 잘 날도록 받쳐주는 대신에 날개를 꺾어버린 아버지, 영조. 사도세자처럼 원하지 않는 길을 강요당하며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다. 자식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부모는 사랑할 의무가 있다. 나는 제대로 사랑받고 지지받았던 자식이었나, 또한, 내 자식은 부모의 제대로 된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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