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담 Apr 20. 2021

역사탐방에세이 5화

 원릉 - 영조를 위한 변명

  융건릉 답사를 끝내고, 다음 답사를 어느 곳으로 갈지 정할 때 자연스럽게 영조의 능을 가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영조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었던 차라 잘 되었다 싶었다. 


<원릉 가는 길>


  내가 사는 동네는 옛 지명이 ‘금암’인데, 역참인 금암참이 있었다. 금암참 자리에 영조의 선행을 기록한 ‘금암기적비’가 있다. 영조가 연잉군이었던 왕자 시절에 숙종의 생신일을 맞아 숙종의 능인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금암참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소도둑이 잡히는 소란이 있었다. 소도둑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연잉군이 참장에게 선처를 베풀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정조가 증조부인 숙종의 능인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조부인 영조가 소도둑을 위해 행했던 선행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비다. 영조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이 비를 답사하면서, 소도둑도 사정이 있을 거라며 잘 살펴 엄한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참장에게 부탁할 정도였던 사람이, 어찌 아들인 사도세자의 사정은 헤아리지 못하고 그런 처분을 내렸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영조는 왜 그렇게 꼬인 성격이었을까?”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읽던 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게 생각난다. 굳이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무수리 아들이라는 자격지심과 재위 내내 그를 괴롭혔던,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모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신분이 낮은 궁녀 출신이었다. 조선 전기의 신데렐라가 세종의 후궁이었던 신빈 김씨라면 조선 후기의 신데렐라는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다. 신빈 김씨는 공노비 출신으로 세종과의 사이에 여섯 아들을 두었고, 소헌왕후와도 사이좋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의 유모 역할도 해서 수양대군이 어머니라 불렀던 여인이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고도 하는데, 고종이 후궁들에게 밝힌 바에 의하면 침방 나인이었다고 한다. 무수리는 나인들에게 세수할 물을 길어다 바쳤던 아주 낮은 계급의 궁녀를 지칭했다. 숙종의 다른 후궁들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더 드러난다.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는 중인이지만 당시 장안에서 제일 부유한 역관(통역) 집안의 출신이며, 연령군(延齡君)의 생모 명빈 박씨의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박효건이다. 영빈 김씨는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인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정식 간택을 거쳐 입궁한 후궁이었다. 그에 비해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가문은 거의 내세울 부분이 없었다. 무수리가 아니라 침방 나인이었다 해도 내세울 거 없는 가문에 신분이 낮았던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수리 아들’이라는 비아냥, 이게 영조의 가장 큰 자격지심이었다. 이 자격지심은 영조가 첫 번째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를 미워하게 된 것하고도 연결된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영조와 정성왕후의 첫날밤에 대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연잉군 시절인 1704년 혼인하였는데, 신혼 첫날의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려고 했는지,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잡으면서 “손이 참 곱소.” 하고 칭찬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정성왕후는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러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영조는 분노하고 말았다. 자신을 낳아준 생모의 출신이 천한 것을 빗대서 말했다고 곡해했던 모양이다.   이후로 영조는 다시는 정성왕후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첫날밤의 사정이야 남이 어찌 알 수 있겠냐마는, 첫날밤 이후 영조가 다시는 정성왕후를 가까이하지 않았기에 이런 이야기가 사실처럼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정성왕후는 영조의 정비로 53년이나 있었지만 철저하게 소박맞은 아내였다. 

 

  정성왕후의 임종 자리에서 있었던 일화다. 정성왕후는 자신처럼 사랑을 못 받는 사도세자가 안쓰러워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양어머니였지만 정성왕후를 무척 따랐던 사도세자는 슬픔에 겨워 울면서 병수발을 드느라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마지못해 왕비를 찾은 영조는 들어서자마자 임종을 앞둔 조강지처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를 향해 “옷매무새가 그게 뭐냐!” 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평소 정성왕후를 향한 영조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추측이 된다. 66세의 정성왕후는 ‘검은 피를 한 요강이나 토하면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이를 두고 “어려서부터 쌓인 것이 다 나온 것 같다.”고 하였다. 허울뿐인 국모, 남편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가련한 여인의 한이 쌓여 화병을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좋아함과 싫어함을 숨기지 않고 확실하게 표현했던 영조는 자식들도 편애하는 자식, 미워하는 자식을 확실히 구별하여 미워하는 자식이 좋아하는 자식과 어울리는 것도 싫어했다고 한다. 영빈 이씨가 낳은 자식들인데도 첫째 화평옹주와 막내 화완옹주는 끔찍이 아낀 반면에 둘째 화협옹주와 셋째 사도세자는 미워했다. 화협옹주는 태어났을 때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효장세자를 잃은 영조가 영빈 이씨가 임신을 하자 아들이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했는데 딸이어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미워했다니, 얼마나 억울했을꼬.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에도 부왕인 영조가 화협옹주와 남편인 사도세자를 미워하였다고 나온다. 영조는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귀를 씻어내는 행동을 했는데, 귀를 씻을 일이 있으면 일부러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를 불러 말을 시켰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올 정도다.   

   

<원릉>

                      

  이래저래 영조에 관한 이야기들을 반추해 보는 사이에 원릉에 도착했다. 정자각에서 무덤에 이르는 언덕이 높아서 사진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찍었는데도 무덤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영조의 능인 원릉에 영조와 같이 나란히 묻힌 이는 정순왕후다. 영조는 원래 정성왕후 서씨를 고양시 용두동에 묻으며 자신의 묘자리를 정성왕후 오른쪽에 표시해 두었다. 그런데 어찌 정성왕후 서씨 옆으로 가지 않고 이곳 구리에 묻혔단 말인가. 살아서도 아내로서 사랑을 못 받더니, 죽어서도 비워둔 옆자리 유택에 남편을 모시지 못하고, 계비인 정순왕후에게 남편을 빼앗겼구나 싶으니, 고양시 서오릉과 구리시 동구릉 거리만큼이나 영조와 정성왕후 사이가 멀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릉의 정자각>


   영조 재위 기간이 무려 51년 7개월이다. 조선 왕조 27명의 왕 중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고, 가장 오래 살았다. ‘조선 왕조 500년’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518년이다. 영조 혼자 조선 왕조의 10분의 1을 이끌었다.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6세였으니, 거의 두 배를 살면서 아버지와 이복형의 뒤를 이어받은 왕위를 손자가 이어가게 이끌어 주었다. 안타깝게도 영조의 업적들보다 먼저 각인된 것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함이다. 영조의 업적들을 배우기 전에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비정한 왕으로 그려진 드라마로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뒤주에 갇히기 직전의 사도세자의 행동들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났던 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조,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라 왕인 영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지독히도 명분,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나라였다. 권력싸움도 대의명분 싸움이요, 왕을 몰아내고 세우는 일도 대의명분을 앞세웠다.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아들의 치료에 힘썼겠지만, 왕인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영조 자신이 노론이 나서서 세워준 왕이었기에 재위 기간 내내 소론이 밀었던 형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모함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경종을 모셨던 상궁들에게 돌보게 했을까. 사도세자의 스승들도 소론쪽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나는 형을 독살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 아들을 그대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아니던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영조가 선택한 일은 결과적으로 노론과 세자를 대척점에 세우는 꼴이 되었으니, 가슴을 치며 후회해 본들 이미 때는 늦었으리. 영조가 칼을 던져주며 아들에게 자결을 명한 것은 영조가 선택할 수 있는 그나마 나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았다. 그게 또 신하들의 도리였을 것이다. 눈앞에서 국본인 세자가 자결한다는데 지켜보기만 했다면 훗날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른다. 다행히 똑똑한 세손이 자라 어느덧 11세가 되었는데, 영민하기까지 하니, 아들을 건너뛰고 세손에게 왕위를 이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비로서, 할아비로서, 왕으로서, 아무하고도 의논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영조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어질까 염려했었는데, 드디어 이어졌다고 무척 기뻐한 영조였다. 그 삼종의 혈맥을 끊어 내쳐야만 했던 영조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오직 영조만이 알 것이다. 마침내 숨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가 시호를 ‘생각 사(思)에 슬플 도(悼)’를 써서 ‘사도’라 정해주고, 장례 절차도 일러준 것을 보니 알 듯도 하다. 내가 알 듯도 하다는 것은, 스스로 자처한 참척의 슬픔 앞에 놓인 그 마음을, 그 고통의 깊이를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칼에 베여 죽이거나 사약을 내려 죽일 수 없었던 이유는 세자가 역모죄여야 가능한 형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세손의 안위를 지킬 수가 없다. 아들을 죽도록 미워해서 뒤주에 가두어 죽인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그리한 것이라 믿고 싶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오늘 영조의 무덤까지 찾아왔지만, 영조의 진실은 들을 수가 없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아무리 괴팍한 성정이 있었다고 해도 아들을 그리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실을 담은 영조의 절절한 비망록이라도 어디선가 튀어나왔으면 좋겠다.                

이전 04화 역사탐방에세이 4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