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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y 04. 2021

역사탐방에세이 7화

 태조 건원릉 - 위화도 회군, 그리고 함흥차사

   동구릉에 가기 위해 구리역에 내렸을 때 ‘왕숙천’에 관한 안내문이 있었다. 왕숙천이 가까이 있는 듯했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인해 함흥으로 갔던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환궁하던 중에 지금의 진접면 팔야리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팔야리’라는 지명은 왕이 8일 밤을 지낸 곳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라 하고, 머물렀던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은 '왕이 자고 갔다'라는 뜻으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풍경이 아름다워 머물렀다고 하나, 한양을 지척에 두고 8일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태조 이성계의 마음이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리역에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지 않았는데, ‘다음 정차할 곳은 동구릉’이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동구릉 입구 홍살문

  


   멀리서도 건원릉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능들은 능침 위 잔디가 곱게 단장되어 있는데, 건원릉 능침 위로는 길게 자란 누런 풀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단장되지 않은 무덤 같지만, 그 유명한 억새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이다. 함경도 함흥에서 자란다는 억새, 청완. 우리가 방문한 날이 3월 31일이었다. 계절적으로 누런빛을 띨 수밖에 없었다. 

건원릉 능침 위 억새

 

   며칠 있으면 한식(4월 5일)이다. 한식날 건원릉의 마른 억새는 벌초가 되어 말끔하게 베어질 것이다. 비록 누런 억새지만 한식일 전에 와서 길게 자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말끔하게 단장되었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왕릉은 1년에 보통 4번 벌초하는데, 건원릉의 능침은 1년에 한 번 한식에만 벌초한다. ‘청완’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고향인 함흥에 묻히길 원했다는 이성계. 왕의 소원인데도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의 무덤은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왕릉 조성에 관한 규범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까지도 들어줄 수 없었던 태종 이방원은 함흥에서 자라는 억새인 ‘청완’을 가져다 봉분 위에다 심도록 명했다. 그것으로나마 불효를 조금이나마 덮고 싶었을 것이다. 그 ‘청완’과 함께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부자의 이야기도 60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사진을 찍는데, 출입금지 금줄을 넘을 수 없어 멀리서 찍을 수밖에 없는데도 길게 자란 억새의 흔들림이 보였다. 마치 이성계의 분노 같았다. 

  “네 이놈, 방원이, 네가 어찌, 네가 어찌…….”

  분노에 치를 떨던 이성계. 작고한 김무생 배우가 이성계 역을 맡아 열연한 드라마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실제 이성계의 분노가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았으리라. ‘함흥차사’라는 고사성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 왕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창업할 수는 있었지만, 둘째 부인 소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 두 아들이 첫째 부인 소생인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본인 사후도 아니고, 멀쩡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당한 일이라, 그 분노와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들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했고, 왕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묻힐 무덤의 위치마저 정할 수 없었고, 사후이기는 하나, 본인 곁에 두려고 도성 안에 묻었던 둘째 부인의 무덤을 파헤치는 아들을 막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척 사랑했다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 곁에 묻히고 싶었겠지만, 태종 이방원이 그럴 리가 없었을 테니. 차라리 함흥에 가 묻히고 싶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묻히고 싶었던 이유가 단지 고향 땅을 그리워했기 때문일까. 새 왕조 창업하기 이전 화목했던 가정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비를 따르는 아들들과 말을 타고 달렸던 억새밭, 푸른 꿈만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은 아닐까.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 정치적 격랑 속으로 발을 내딛기 이전의 시절. 그가 원한 것은 꿈이 있던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 차라리 동북면의 실세, 동북면의 호랑이로 삶을 마감했다면, 패륜을 저지르는 아들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명령을 어긴 일이었고, 반역이었다. 요동땅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정했던 이성계 부대는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네 가지로 요약된 선언문을 통해 회군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성계 일파는 최영 장군을 척살하고, 우왕을 죽이고, 창왕을 내세웠다가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마지막에는 공양왕마저 죽였다. 고려를 이끌던 두 명의 장군 중 한 명은 피살되었고, 한 명은 반역을 일으켰다. 이른바 역성혁명의 시작이었다. 왕조의 성을 바꾼다는 역성혁명. 새 왕조 창업에 찬성하는 사대부들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가져와 역성혁명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뒷받침하였다. 고려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이색의 문하생들은 두 쪽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개혁파와 혁명파. 한쪽은 고려를 개혁하여 새롭게 쇄신하자는 파였고, 한쪽은 고려를 뒤엎어 새 왕조를 창업하자는 창업파.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역성혁명파들의 승리였다. 고려 왕실의 종묘는 허물어지고 조선 왕실의 종묘로 대체되었다. 고려 왕족들은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졌고 몰살당했다. 왕씨가 세운 왕조가 사라진 땅에 이씨가 세운 왕조가 뿌리를 내렸다.     

건원릉 안내표지판

  

   그런데 건국한 해(1392년)에 세자의 자리는 엉뚱하게도 둘째 부인의 소생인 열한 살짜리 이방석이 차지했다.      

  

   조선은 무인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정도전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세운 나라이기도 하다. 사대부들은 맹자의 역성혁명이론을 가져와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 왕조를 창업하는 데 대의명분을 제공했다. 정도전 같은 역성혁명파는 왕권 중심의 나라가 아니라 입헌군주제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래서 혁명의 와중에 칼을 들고 전장에서 싸운 이방원이 아니라 온실의 화초 같은 열한 살짜리를 세자로 내세우는 데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이방원이야말로 강력한 군주가 될 자질이 넘쳤기 때문이다. 경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야말로 전제주의 국가에서 왕의 재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생각했던 국가는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사대부들의 대표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였다. 핏줄로만 내려가다 보면 자질이 안 되는 왕이 나올 경우 나라의 존망이 흔들릴 염려가 있지만,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재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새 왕조 창업에 유력한 친정 가문을 끌어와서 힘을 보탰던 신덕왕후 강씨가 자기의 소생으로 세자를 세우려고 욕심을 내었다. 신덕왕후를 몹시 사랑했던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의견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차기 왕에서 멀어진 이방원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칼을 들고 아버지를 도와 전장에서 싸웠던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 중 한 명이 아니라, 새 왕조 창업할 때 걸음마를 배우던 아기에 불과했던, 서모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복동생이 세자로 세워졌으니 말이다. 때를 기다리며 와신상담하던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가 죽은 후 그녀의 소생인 두 아우와 정도전 등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 적극 찬성했던 대신들을 척살하였다. 역사는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혹은 ‘이방원의 난’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승하한 후에는 왕비의 격식에 맞춰 현재 정동에 조성되었던 신덕왕후 무덤을 기어이 허물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소재조차 몰랐다가 선조 대에야 비로소 무덤의 위치가 알려졌다고 하니, 서모를 향한 그의 분노가 어땠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을 겪고, 죽어도 이방원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둘째 아들인 이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다. 이 와중에 이방원은 동복형제인 회안대군(이방간)이 일으킨 난을 진압했다. 역사는 이를 ‘제2차 왕자의 난’ 혹은 ‘방간의 난’이라 이름 붙였다. 승리한 이방원은 회안대군은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자기와 칼을 들고 싸운 형제지만, 동복형제라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정종은 서둘러 이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도 자신은 임시로 왕위로 앉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순서였다.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은 정안대군인 이방원이 왕좌에 이르는 길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함흥에 간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차사를 보냈다. 효를 다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왕위를 인정받아야만 했다. 나라가 창업된 지 불과 7년 만에 벌어진 이 일로 민심은 흉흉했고, 민심을 수습하고 본인이 꿈꾸던 나라를 만들려면 아버지의 인정이 몹시도 필요했을 것이다.      

  

   태종 이방원에게 분노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함흥차사란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이다.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아무런 소식도 없을 때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그렇게 이성계는 아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했다. 극을 치닫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애꿎은 신하들만 죽어 나갔다. 이방원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함흥으로 아니 갈 수도 없고,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에 비분강개한 박순이 스스로 함흥에 차사로 가겠다고 나섰다. 박순은 태조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에 설마 자기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순이 설득이 주효했는지, 태조 이성계의 결단에 의한 것인지, 이성계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러려고 왕이 되었나.”

   회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새 왕조를 얻었지만, 말년의 회한과 쓸쓸함이 참으로 크게 느껴진다. 새 왕조를 창업한 왕이었으면서도 정비나 계비 곁에 묻히지 못하고 홀로 묻힌 사람. 동구릉에 묻힌 왕들 중에 부인 없이 홀로 묻힌 이는 태조밖에 없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쓸쓸한 남자. 그의 회한이 바람이 되어 무덤 위 누런 억새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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