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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Apr 27. 2021

역사탐방에세이 6화

세조 광릉 - 권력이란 무엇인가

   광릉으로 답사가기로 한 날이 공교롭게도 시장 보궐선거일이었다. 좀 서둘러 투표를 하고 가려고 나섰는데, 의외로 줄이 길었다. 1년 남짓한 자리인데도 선거 열기가 대선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래서 그런지 임시공휴일이 아닌데도 투표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약속시간 때문에 조급해진 나는 투표를 하고 가야 되나, 포기하고 그냥 가야 되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나 하나 투표 안 한다고 판세가 바뀔 것 같지도 않고, 투표권을 포기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조금 늦더라도 투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참정권을 얻으려고 투쟁했던 여성들에 관한 영화가 생각났다. 당연하게 행사하고 있는 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삶을 걸고 투쟁했다는 것을 상기하니, 투표하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광릉을 가는 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불편했다. 경찬맘이 기꺼이 나서서 운전해 주었다. 덕분에 편하게 갔다.     

 

  “세종은 차라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왜 문종에게 물려주어서 그 사단이 나게 했을까? 아들을 몰라도 너무 모른 거 아니야?”


<광릉 가는 길>



   아직 광릉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지호맘이 한마디 했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조카에게서 왕위를 뺏는 과정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알고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가 아니기에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안타까운 역사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생떼라도 써서 돌려놓고 싶어진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데도.


  세종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에게 섭정을 맡기면서 대군들도 정사에 참여하게 했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낳은 아들들이 걸출하게 잘 났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종의 자식 사랑은 유별났다. 세종의 서장자 화의군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도 그런 말을 했다. 아들들의 능력을 썩히기가 아까워서일 수도 있고, 자식 사랑이 유별났다는 세종의 마음 탓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이것이 여러 대군들을 비롯한 종친 세력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한 후에도 수양대군은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문제는 병약했던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문종의 어린 아들(단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조정은 본격적인 권력 다툼의 장이 되고 말았다.      

  

   세종의 잘난 아들들과 문종의 유언을 받았다는 의정부 대신들 사이에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증조부인 태조 이성계와 조부인 태종 이방원의 핏줄답게 호방한 무인 스타일이었다. 그런 수양대군의 주변에 유독 무인과 건달들이 모여들었다. 반면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학문과 예술에 밝아서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의정부 대신들은 수양대군을 견제하려고 안평대군과 결탁했다. 안평대군은 의정부 대신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자 의정부 대신들의 인사권 장악으로 요직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일부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정인지, 신숙주 등이 대표적으로 수양대군 편에 가담한 집현적 학사 출신 인물들이다. 언제나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앞세우나 어떤 정변이나 쿠테타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밑바닥에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깔려있다는 것을 여기서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정난(靖難)’이란 한자어를 보면, ‘병란(兵亂)을 가라앉혀서 나라를 평안하게 하다’는 뜻이다. ‘병란’이란 ‘나라 안에서 무력으로 싸움질하는 난리’를 뜻하니, 나라 안에서 무력으로 싸움질하는 것을 바로 잡아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다고 그리 이름을 붙였겠지. 입으로는 종묘사직을 팔고 백성을 팔았겠지만, 세종 입장에서 보면 단종이나 수양대군이나 자신의 직계혈족이요, 백성 입장에서 보면 높은 자리에 앉은 권력자들의 권력투쟁이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멸망할 때까지 수양대군의 핏줄에 의해 왕위가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지 않던가.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인해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화를 입은 당사자들이나 후손들 입장에서 ‘정난’이란 이름을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유정난 최고의 수혜자는 아마도 칠삭둥이 한명회인 듯하다. 수양대군이 ‘나의 자방’이라고 말했다던 한명회. 자방은 한나라 고조의 책사였던 장량의 다른 이름이다.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이는 권람이라고 하는데, 권람은 이성계를 도와 새 왕조 창업에 중심 역할을 하여 개국공신이 된 권근의 손자이며, 수양대군과는 집현전 교리로 있을 때 서책편찬을 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했던 인연으로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천거하였다고 하니, 친구 잘 둔 덕이고, 수양대군 쪽에 갔으니 줄을 잘 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일을 도모하는 인연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태조 이성계의 개경 사저인 경덕궁의 한낱 궁지기였던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만난 후 영의정이 되기까지 걸린 기간이 불과 13년이었다.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 그뿐인가. 권력만 가진 게 아니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불렀던 한명회가 받은 직전과 공신전을 합하면 무려 820결이다. 1결이 약 3천 평이라 하는데, 얼른 계산이 안 될 정도다. 전자계산기로 두들겨 확인하니 246만 평에 달했다. 참고로 신숙주가 690결, 정인지가 570결 받았다고 한다. 그들도 세조의 왕위찬탈 공신들이었다. 


   수양대군에서 스스로 왕이 된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에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대거 참여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이 집현전을 폐지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없애고, 육조직계제를 부활했다. 여러 신료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인 ‘경연’을 폐지하는 대신 비서 역할을 하는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했다.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펼쳤지만, 오히려 공신들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광릉 안내표지판>

    광릉에 도착해 안내표지판을 읽는데, 두 가지가 시선을 끌었다. 하나는 1455년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의 양식이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묘 대신 회격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분명 ‘양위’라고 쓰여있는데, 나는 ‘찬탈’이라고 읽혔다. 석실묘 대신 회격묘로 했을 때 비용이 덜 들고, 묘 조성 기간이 짧아지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도굴을 염려한 세조의 근심이 그런 유언을 하게 한 것은 아닌가 의심되었다. 회반죽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콘크리트쳤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삽과 괭이를 가지고 파면서  내려간다고 한들 콘크리트벽을 허물기 어려울 테니까. 수양대군 편에 선 이들은 공신이란 칭호를 받으며,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에게서 빼앗은 전답과 처첩과 노비들을 나눠 가졌으니. 원통한 이와 원한이 뼈에 사무친 이들이 한둘이었겠는가.      


   세조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해 능 관리를 철저히 당부했다. 보통 능 관리 책임자가 종9품인 능참봉 벼슬인데 이곳 광릉만 종 6품인 능령 벼슬이었다 하고, 그 권세가 한 급 위인 현감인 사또를 능가하였다니, 조선 왕실에서 광릉을 어찌 대했는지 알겠다.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던 덕에 광릉 일대가 오늘날 국립수목원이라는 지위를 갖게 될 정도로 자연이 잘 보존되었다.      

  

   “나으리, 조선의 주공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으십니까?”

   사육신들이 살이 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왕이 된 수양대군을 ‘전하’라 칭하지 않고 ‘나으리’라 칭하며 피를 토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다. 그런데 배우의 열연이 아니고 그 국문 현장에 서 있었던 착각이 든다. 

   주공은 주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동생으로 무왕의 권력 강화를 도왔다. 무왕이 죽자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쳤다.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하는 길을 택해, 왕권을 넘보는 동생들을 제거했고, 조카 성왕에게 통치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7년 동안 섭정한 후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날 때쯤에는 주의 정치·사회 제도가 중국 북부 전역에 걸쳐 확고히 수립되었다. 그가 확립한 행정조직은 후대 중국 왕조들의 모범이 되었다. 공자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주공을 대단히 숭배하여 그를 후세의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격찬했다. 

   사육신의 피울음에 마음 바뀔 세조가 아니었다. 그리고 계유정난 이후 공신의 작위와 함께 내린 권력과 부의 단맛을 흡족하게 누리고 있던, 이른바 공신세력들이 그렇게 되도록 가만있겠는가.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세조는 살아서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르고 갔다고 본다. 세종처럼 성군을 만들고 싶었던 첫아들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의경세자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세조도 어느 날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침을 퉤, 하고 뱉은 후부터 가려움증과 부스럼을 동반한 피부병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세조와 세조의 가족들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세조 사후이기는 하나 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예종도 재위 1년 2개월 만에, 형인 의경세자와 마찬가지로  20세에 요절하였다.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이 똑같이 20세에 요절이라니, 우연의 일치겠지만, 왠지 단종이 17세에 죽임을 당한 것과 관련되었을 것만 같다.      

  

<세조, 여기에 잠들다>


  

    세조는 52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재위기간이 고작 13년 3개월이었다. 겨우 반백 년을 살면서 천 년을 살 것처럼 권력을 탐했고, 그 결과 조카를 죽이고, 이복형제들은 물론 동복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와 형의 신하들을 죽이고, 인재양성소 역할을 하던 집현전을 없애버렸다.      


  "권력이란 무엇인가요? 그렇게 많은 피를 손에 묻히며 잡을 만하던가요? 동네 부녀회장도 나서서 해본 적이 없는 일개 필부인 제가 감히 전하께 묻습니다."     


 

< 왼쪽 세조 능 오른쪽 정희왕후 능>

  

  누군가는 피의 군주라 하고, 누군가는 치적의 군주라 하는 광릉의 주인은 말이 없다. 세조와 정희왕후 무덤 사이에 빗물이 지나가는 물길을 이룬 돌덩이들만 봄볕에 데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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