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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y 11. 2021

역사탐방에세이 8화

장렬왕후 휘릉 – 후궁의 핍박을 받다

   “와, 누구 무덤인데, 정자각이 저렇게 화려하고 예뻐?”

 정자각이 보이자마자 경찬맘에게서 감탄사가 나왔다. 안내표지판 설명을 보지 않고도 휘릉인 것을 알겠다. 바로 익랑 때문이었다. 익랑은 본건물 옆에 덧붙이는 회랑이라고 보면 된다.      

   휘릉은 화려한 정자각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여러 왕릉의 정자각을 보았지만, 이제껏 본 정자각 중에서 가장 고혹적이었다. 그것은 단아한 정자각 정전 양옆에 덧붙인 익랑(翼廊) 때문에 그랬다. 

장렬왕후 휘릉 전경


   왕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불행한 왕비들이 많다. 휘릉에 묻혀있는 장렬왕후는 ‘불행한 왕비 열전’이 있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삶을 살았다. 


   인조 16년(1638년) 장렬왕후 조씨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마흔넷이나 되는 인조와 혼인하였다. 당시 인천부사로 있던 부친 조창원은 막내딸이 왕비로 간택되자 “네가 왕자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아버지 마음이 담긴 말이었을 것이다. 막내딸을 계비로 맞은 인조는 반정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된 사람이었다.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광해군과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왕후와의 대립이었다.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 소생인 왕자들이 넷이나 있었던 만큼 혹여 인조의 계비가 된 막내딸이 왕자를 생산하여 궁중 암투의 희생양이 될까 염려하여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내딸은 아들을 낳기는커녕 잉태 한 번 못하고 늙었으니, 아들을 낳아 궁중 암투에 휘말릴까 염려했던 부친의 걱정은 기우였다. 혼인 첫날 밤 인조는 예의상 같이 밤을 보냈다고는 하는데 그뿐이었다. 그 후 단 한 번도 중궁전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속된 말로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법이다. 

 

   정비인 인렬왕후가 사망한 이후 인조의 마음을 차지한 여인은 조씨 성을 가진 후궁이었다. 아무리 총애하는 후궁이어도 미천한 출신이었기에 왕비의 자리에 올릴 수는 없어, 간택령을 내려 새 왕비를 들였지만, 여전히 인조의 마음은 귀인 조씨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렸던 장렬왕후는 새로 맞이한 왕비에게 냉정한 인조 탓에 중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노회한 후궁 귀인 조씨의 눈치를 살피는 가련한 신세로 지내야 했다. 

  

  심지어 1645년 인조는 왕비가 불길하고 전염의 위험이 있는 병을 앓고 있다며, 어의들을 불러 처방을 내리게 하고, 왕비의 거처를 경덕궁으로 옮기게 했다. 허울뿐인 왕비이기는 했으나 엄연한 중궁전 안주인이 거처마저 빼앗기고 별궁에 유폐되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장렬왕후는 1645년 8월부터 1649년 4월까지 내의원에서 처방한 청심온담탕, 용뇌안신환, 자하거환 등을 복용하였다. <승정원일기>를 연구한 한의학자들에 의하면 장렬황후가 먹었던 처방약들은 간질에 사용되는 약이라고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조가 사망하자  내의원에서는 더 이상 장렬왕후에게 간질을 치료하는 약을 처방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왕이 죽자마자 왕비의 간질 증상이 사라졌다? 왕이 왕비의 간질 유발원인이었다? 아니다. 왕비가 간질을 앓았다는 게 날조된 것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꽃은 피었다. 사랑받지 못한 왕비였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서 장렬왕후의 용모는 화사한 꽃처럼 피어났다. 어린 중전이 완숙한 여인의 자태로 거듭나자 왕의 사랑을 빼앗길까 염려한 귀인 조씨는 뒤에서 중전을 모함하여, 아예 인조의 눈길이 왕비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인조를 조종하였다. 


   귀인 조씨가 친아들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 소생인 봉림대군이었다. 효종은 부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조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인 장렬왕후에게 왕실 최고어른의 지위를 부여하고, 창덕궁 만수전을 수리하여 거처로 삼게 하였다. 더 나아가 효종은 “신하가 되어 감히 질병이 없는 국모를 함부로 모함했으니 대역무도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간질에 관한 약을 처방했던 어의들을 추궁하였다. 그렇게 하여 왜곡되었던 진실이 밝혀졌다. 없는 병도 만들어 내면서 인조가 왕비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공작하였으니, 귀인 조씨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효종 등극 후 10년이 그녀에게는 그나마 햇살이 비추는 날들이었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효종이 승하한 후 장렬왕후는 갑작스럽게 역사기록에 튀어나온다. 자의대비 복상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극렬하게 대립하였는데, 바로 자의대비가 장렬왕후다. 바로 우리가 역사책에서 ‘1차 예송논쟁’이라 배운 그 사건이다. 장렬왕후가 상복 입는 기간을 ‘3년으로 할 것인가, 1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1년 상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왕위를 이었으니 맏아들로 대우하여 3년 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생결단 대립 끝에 서인들이 이겼다. 이로 인해 남인들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이때 남인이었던, 효종의 스승이자 오우가를 지은 윤선도가 일흔셋의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장렬왕후 휘릉 안내표지판


   그로부터 15년 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였다. 이번에도 장렬왕후 복상 기간이 ‘9개월이냐, 1년이냐’를 두고 서인과 남인들이 격돌했다. 역사책에서는 ‘2차 예송논쟁’이라 기록된 사건이다. 이번에는 남인들이 승리했다. 남인들이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하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사사되었다. 똑같은 이유인데 한 번은 서인이, 한 번은 남인이 승리하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혹은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역사를 처음 배울 때는 ‘참 할 일도 더럽게 없네. 고작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사생결단 싸움을?’ 싶었는데, 그건 단순하게 복상 기간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근저에는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누구를 다음 보위에 앉혔어야 했느냐에 관한 것이다. 서인들은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세손이 보위를 이어가는 게, 남인들은 소현세자의 아우인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은 게, 정당했다는 서로 다른 주장이었다. 선조 대 이후 예학이 주를 이루면서 당시 사대부들이 목숨을 걸만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념투쟁이었던 모양이다.      

  

   예송논쟁 이후 장렬왕후가 다시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등장한다. 바로 장희빈 때문이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희빈 장씨는 원래 장렬왕후를 모시던 궁녀였다. 숙종이 대왕대비전에 문안인사를 드리러 다니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궁녀에게 홀딱 반했던 모양이다. 그 소식을 들은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가 궁녀 장씨를 궁 밖으로 내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감히 손주며느리가 대왕대비가 아끼는 궁녀를 내치다니. 명성왕후 김씨는 성격이 드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당시 내명부 최고수장인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손주며느리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명성왕후 승하 후에 궁녀 장씨는 보란 듯 입궐하였고, 마침내 숙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었다. 아들을 낳아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니, 사람의 앞일이란 모르는 일이고, 일단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년) 향년 65세로 사망하였다. 재물에 욕심이 없고 맑은 성정을 가져, 국모로서 가장 모범적인 여인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국모의 역할을 할 기회가 과연 몇 번이나 주어졌는지 궁금하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니, 그저 한 맺힌 삶을 살다 갔다는 느낌만 강하게 맴돌았다.  


   어떻게 지내온 삶과 걸맞지 않은 거창한 글자가 시호와 능호로 쓰였을까. 게다가 정자각은 화려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니. 누가 이 정자각을 설계하였을까. 

  - 아름다울 휘. 

  - 엄숙할 장 또는 씩씩할 장.

  - 세찰 렬, 또는 매울 렬.

  글자 한 자 한 자 뜻을 따지고 새기는데, 지호맘이 한소리했다. 

  “어찌 인조는 이리 밉상이냐. 아들도 질투해, 며느리도 죽여, 새장가를 가지 말든가.”

  우리의 마음에 장렬왕후의 한 많은 삶이 이심전심 전달되었나 보다. 


    ‘장렬’의 시호가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휘릉’이라는 능호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는 사람,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었으니, 능호라도 ‘아름다울 휘’를 넣는 게 마땅하다. 또한, 젊은 청춘을 남편의 무관심과 후궁의 핍박으로 맵게 보내야 했으니, ‘씩씩할 장’자와 ‘매울 렬’자가 시호에 들어가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앓은 적도 없던 간질에 대한 약을 처방받고 복용했음에도 멀쩡하게 견뎌내어 65세까지 큰 병치레 없이 살다 갔으니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하다.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견디고 지켜낸 삶이기 때문이다. 

    

장렬왕후 휘릉

  

  우리는 동구릉에 있는 능 중에서 휘릉에서 가장 오래 서성거렸다. 정자각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어 당긴 휘릉이 능침 안에 잠들어 있는 주인공의 사연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던 탓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이길, 좋은 짝을 만나 꽃길만 걷기를 바라며 휘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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