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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y 17. 2021

역사탐방에세이 9화

현종 숭릉 – 왕을 공처가로 만들다

  숭릉에 도착한 순간 “맞아, 왕비라면 이 정도의 삶은 살았어야지”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과 함께 쌍릉의 형태로 나란히 묻혀 있다. 숭릉의 쌍릉은 다른 쌍릉과 느낌이 다르다. 명성왕후 김씨의 위풍당당이 느껴진다. 조선 왕조 왕비 중에서 명성왕후 김씨처럼 남편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혼자만 독차지하고 살다간 이는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아들인 숙종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영화 <올가미>의 시어머니와 비교되기도 한다. 아들의 사랑하는 여자마저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나란히 묻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주나라 왕실을 모범으로 삼아 왕실의 자손들이 번성하고, 대대손손 복록을 누리기를 바랐다. 자손을 많이 두어 왕실을 번영하게 하는 게 나라를 번영하게 하는 거라 믿었다. 20세에 요절한 의경세자(인수대비의 남편)나 예종의 경우에도 후궁들이  있었다. 불과 열일곱 살에 죽은 단종마저 후궁이 있었다. 후궁을 들이는 게 왕실의 전통이라 여겨질 정도로 세자의 후궁들도 양제, 양원, 승휘, 소훈 같은 책봉을 받았다. 간택하여 뽑은 후궁들은 ‘간택 후궁’이라 하는데 이른바 명문가의 여식들이었다. 

  

  그런데 인조 대 이후에는 후궁 숫자가 확 줄었다. 처첩 관념의 심화와 유교적 예의 실천이 강조되면서 제례 기간으로 인한 왕의 금욕기간이 늘어나게 된 영향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후궁을 들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자이던 11세 때 한 살 어린 명성왕후 김씨와 혼인을 한 현종은 평생 단 한 명의 후궁도 들이지 못했다. ‘들이지 않았다’가 아니라 ‘들이지 못했다’라 하는 것은, 현종의 마음이 일편단심 명성왕후 김씨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종이 마음에 두었던 한 궁녀에게 후궁 첩지를 내리려고 하였지만, 명성왕후 김씨의 눈치를 보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명성왕후 김씨의 불같은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명성왕후 김씨 아니면 어느 왕비가 감히 왕에게 ‘나 하나로 만족하시라’ 할 수 있을까. 왕조 시대 아닌 오늘날에도 소위 성공했다는 남자들이 혼외자 외의 여성과 내연관계에 있거나 공공연하게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재혼하는 사례들이 흔하다. 하물며 후궁을 들이는 게 당연한 왕실에서 남편을 압박해 후궁을 단 한 명도 들이지 않게 한 명성왕후 김씨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당찬 여성이다. 왕비의 자질이나 덕행을 떠나, 당당하게 왕과 맞서 여자로서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숭릉 안내 표지판

  현종 대는 매우 혼돈한 시기였다. 신하들은 예송논쟁을 벌여 편을 갈라 정치싸움을 하였고, 대기근, 홍수, 태풍, 전염병 등으로 30~40만 명의 백성들이 사망하였다. 현종 자신은 평생 피부병과 눈병에 시달렸으며 온천욕을 한 달 이상 꾸준히 해야 피부병이 호전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조선의 왕들은 피부에 생긴 질환으로 인해 고생이 많았는데, 현종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종은 1674년 모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같은 해 8월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는 남편이 승하한 후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탄탄한 정통성을 갖춘 그녀의 외아들 숙종이 열네 살 어린 나이로 다음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왕대비가 되었고, 유력한 서인 세력이었던 명성왕후의 친정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열네 살 소년 왕이 수렴청정 없이 왕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숙종의 타고난 영특함도 있었지만, 김석주를 비롯한 외척 세력이 물밑으로 조력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숙종은 유약했던 아버지의 성정을 닮지 않고 드센 성정의 어머니를 닮아 거침이 없었다.    

 

  숙종은 ‘예송논쟁’의 당사자인 송시열을 부왕 현종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예송의 죄를 물어 삭탈관작하고 유배시켜 버렸다. 현종이었다면 그런 결단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송시열이 누구던가. 할아버지 효종의 스승이요, 서인의 거두이며, 유림의 종사였다. 반발은 예견된 일이었을 터인데도 어린 소년 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머니 명성왕후의 기질을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물려준 드센 기질은 숙종에게는 강력한 유산이었을 것이다. 선조 이후 왕들은 신하들에게 많이 휘둘린 편이었는데, 숙종 대에 와서는 달라진다. 국정운영의 중심에 왕이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사랑마저도 반대세력을 누르는 데 활용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 효종, 현종 대를 살펴보면, 숙종은 선대들하고 확실히 다른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었다. 어머니의 강한 기질을 물려받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침이 없었던 명성왕후 김씨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바로 자식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과의 사이에 1남 3녀의 자식을 두었다. 그런데 첫째 딸과 둘째 딸을 천연두로 잃었다. 당시 천연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위험한 질환이었다. 숙종은 크게 아프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그런데 숙종 9년 한양에 천연두가 크게 창궐하였는데, 이때 20대인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이 천연두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명성왕후 김씨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혹여 아들이 독살당할까 염려하여 수라상의 음식들을 기미 상궁을 제치고 손수 기미할 정도로 유별난 어머니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가만히 앉아서 어의들의 의술만 기다리지 않았다. ‘막례’라는 무당을 불러들였다. 명성왕후는 ‘막례’라는 무당을 매우 신임하여 좋은 집과 노비, 가마를 선물로 내렸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소사 및 개인적인 고민거리를 상의하였다고 한다. 막례는 가마를 타고 대궐을 들락거렸고, 궐내에서도 귀부인처럼 행동하여 신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으나 명성왕후의 권세가 워낙 막강하여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성왕후 김씨는 막례의 말을 듣고, 굿을 하였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막례 옆에서 명성왕후 김씨는 매서운 한겨울 날씨인데도 하얀 속옷 차림으로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쓰며 치성을 드렸다. 지켜보던 숙종비 인현왕후와 궁녀들이 흐느껴 울면서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오직 아들을 살리겠다는 집념 앞에 본인의 건강은 안위에 없었다. 굿은 무사히 마쳤지만, 명성왕후 김씨는 의식을 잃고 혼절하였다. 명성왕후 김씨의 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침을 심하게 하였으며, 폐와 가슴 부위에 통증을 호소하였다. 인현왕후가 의관을 부르려고 했지만 명성왕후 김씨가 아무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무당이 궐 안에서 굿을 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아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 5일 왕대비가 목이 붓고 아프고 기침이 심하다는 소식을 들은 의관들은 단순한 감기로 판단하여 약을 처방하여 올렸다. 명성왕후 김씨는 이날 사망하였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연구한 한의학자들에 의하면 독감으로 인해 발병한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병석에 앓아누웠을 당시 바로 의관을 불러 폐렴의 합병증에 대한 치료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명성왕후 김씨의 죽음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천연두에서 살아나자마자 모후의 죽음을 알게 된 숙종은 얼마나 황망하였겠는가. ‘무녀 막례가 궐내에 들어와 굿을 하고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핑계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니 형벌을 가중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러나 숙종은 ‘현명하신 대비께서 무당에게 현혹될 리가 없다. 대비께서 돌아가신 것은, 단지 나의 불효 때문이니 더욱 통탄스럽다. 이는 소문이 잘못 나서 생긴 일이다’라며 처단하라는 신하들의 요구에도 섬으로 귀양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는 모후가 아꼈던 무녀에 대한 배려임과 동시에 왕대비가 굿판을 벌이다 사망하였다는 황당한 사건에 대한 수습 차원이었을 것이다.      

 

숭릉 전경


  명성왕후 김씨는 그 일만 없었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았을 여인이었다. 왕비들이 흔히 앓았다는 화병하고도 거리가 멀었다. 화병이란 말 그대로 화가 쌓여서 생기는 병이니, 그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병이다. 성격대로 살다가 성격대로 급히 갔다고밖에는. 그녀가 오래 살았다면 희빈 장씨가 왕비까지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서 인생이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명문가의 딸에다 왕인 남편에게 단 한 명의 후궁도 허하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왕이 된 아들의 어머니. 그 정도만 본다면 꽤 성공한 인생이다. 굿판에서 행한 어이없는 일로 명을 재촉했다 해도, 그녀의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허울뿐인 왕비들에 비하면 얼마나 찬란한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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