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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y 24. 2021

역사탐방에세이 10화

 문종 현릉  – 그 강을 어찌 건넜나

   현릉의 안내표지판을 보자 나도 모르게 휴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장소였기 때문이다. 문종처럼 오랜 기간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차근차근 쌓은 인물이 조선왕조에 있었던가. 그는 무려 29년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고, 29세 되던 해에는 세종을 대신해 8년 동안 섭정했다. 한 마디로 준비된 왕이었다. 측우기는 직접 발명해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은 집권 후반기에는 거의 병석에 누워 지내다시피 했고, 세자였던 문종이 8년 동안 섭정하면서 국정을 이끌었는데, 이 기간에 세종의 주요 업적들이 이루어졌다. 문종은 천문, 산술, 역수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능했다. 유순하고 자상한 성격이라 대간들 의견을 잘 경청하여 조선 역사상 대간 활동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였다.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그의 업적이 저평가된 면이 있다. 

  문종은 안타깝게도 39세에 승하하고 말았다. 원래 병약했던 데다 세자 시절의 과중한 업무가 그의 건강을 해쳤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두 아우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 모후인 소헌왕후, 부왕인 세종의 장례를 연달아 치르느라 그나마 버티고 있던 체력이 다 소진되었을 것이다. 2년 3개월 재위 기간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아 재위 기간이 길었다면, 세종 - 문종 - 단종으로 이어지는 치세로 이어졌을 터인데, 참으로 아쉽다. 


  “조선의 역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6세인데, 그것만 채웠더라도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단종이 19세가 되었을 터이고, 든든한 처가를 선택해 단종을 혼인시켰다면.”

  “단종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단종만의 비극인가. 딸인 경혜공주와 사위인 정종, 그리고 사육신 등 세조의 왕위찬탈로 인한 희생자들이 안 생겼을 텐데.”

  “아, 차라리 세종이 병약한 문종을 제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든가.”

  “섭정을 8년 동안 했는데, 그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래도, 너무 안타깝다. 문종이라도 아들 말고 동생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단종은 안 죽었을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사생결단의 장이 되었겠지요. 단종이 적통인데.”

  “아, 그래도 세종은 아들을 너무 몰랐어. 문종은 동생을 너무 몰랐고.”

  “믿었겠지요. 아들을, 동생을, 신하를, 죽일 줄 알았다면 아들의 안위를 다짐받고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받으라 했겠지요.”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면 어머니가 살아있던가, 아니면 할머니라도 살아있던가, 하다못해 외가가 빵빵하던가, 이거야 원, 고립무원이었으니, 세종대왕의 장손이 고아와 뭐가 달라.”

  단종의 부모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 앞에 서니, 이심전심 안타까운 마음에 두서없는 말들이 주절주절 이어졌다. 


문종 여기 잠들다 

  문종은 아내 복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문종은 세자 시절에 두 번이나 세자빈을 폐하고 세 번째 세자빈을 맞이했다. 그런데 세 번째 세자빈은 단종을 낳은 후 이틀 만에 사망해, 문종이 보위에 오를 때는 왕비 자리가 비어있었다.


   문종은 열네 살 때 (세종 9년) 휘빈 김씨와 혼인했으나 세자빈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문종이 세자빈을 가까이하지 않은 이유가 휘빈 김씨가 문종보다 네 살이나 많았던 데다 몸집이 크고 못생겼기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휘빈 김씨는 태종 대에 만든 간택제도에 따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혔는데도 문종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휘빈 김씨는 은밀한 술법을 동원해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다. 이러한 불순한 행실이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휘빈 김씨를 쫓아냈다. 이혼이 쉽지 않았던 유교 사회에서 세자를 이혼시킨 것이다. 

   세종은 휘빈 김씨가 외모가 별로여서 아들이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아담하고 예쁜 처녀를 세자빈으로 간택하였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순빈 봉씨는 학구적인 문종의 짝으로서는 맞지 않았다. 문종은 새 세자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가 난 순빈 봉씨는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궁녀와 동성애 추문을 불러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은 순빈 봉씨도 폐출시켰다. 

   문종의 몸이 허약해 여색을 멀리한 게 문제였는지, 처음부터 자질이 부족한 세자빈들을 연달아 간택한 세종 부부의 안목이 문제였는지, 정확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문종이 폐출된 부인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조신하여 간택한 며느리도, 예쁘다고 간택한 며느리도 아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세자빈 간택에 관여한 세종 부부의 속도 타들어 갔을 듯하다. 내 맘 같지 않은 게 자식 혼사다. 일반 가정이나 왕실이나 맘에 딱 드는 혼사란 그만큼 어렵다.      

  

   세종은 새 세자빈을 간택하는 대신 후궁 중에서 문종과의 사이에 딸을 낳아 승휘에서 양원으로 품계가 올라가 있던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게 했다. 문종은 승휘 홍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세종은 두 딸이나 낳은 데다 품계가 한 단계 위인 양원 권씨를 세자빈으로 세우는 게 도리상 맞다 여겼다 한다. 양원 권씨가 바로 현덕왕후인데, 단종을 낳고 이틀 만에 향년 24세로 사망하고 말았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힘들게 낳은 후 더는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자, 궁녀를 시켜 시어머니인 소헌왕후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를 모셔오게 하였다. 그녀는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핏덩이 아들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오죽 그 모습이 애처로웠으면 혜빈 양씨가 자기 소생 젖먹이 아들을 떼어내 유모에게 맡기고, 갓난아기 세손에게 자기 젖을 물리며 직접 키웠을까.      

  

  잇따른 세자빈의 부재는 문종의 불운이기도 했지만, 세종 부부의 아픔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세종 부부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병석에 누워 있던 세종은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 세자였던 문종 역시 병약하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 염려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기회만 있으면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손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문종 역시 병색이 짙어질수록 어린 세자가 걱정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을 앞에 두고, 손으로 어린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면서 술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문종은 죽기 전 김종서, 황보인(皇甫仁) 등 이른바 고명대신들을 불러 아들을 잘 보필해 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어린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신하에게 아들을 부탁했던 문종. 죽어가는 순간에도 핏덩이 아들을 부탁하기 위해 다급하게 시어머니와 혜빈 양씨를 찾았던 현덕왕후. 어린 자식을 두고, 돌아올 수도, 돌봐줄 수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야 했던 두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졌을까. 저승으로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 것인가. 어찌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강을 건넜을까. 제대로 강을 건너가기는 했는가.      

 

   어린 아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부부의 예감은 불행하게도 들어맞았다. 아들은 왕위를 숙부 수양대군에게 빼앗겼고, 죽임을 당했다. 그뿐인가. 하나뿐인 사위는 단종복위운동에 관련하여 거열형을 당했다. 현덕왕후의 친정어머니와 남동생도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처형되었는데, 그 일의 여파로 현덕왕후는 서인으로 격하되어, 종묘에서 신위가 내쳐져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급기야는 맏아들 의경세자의 급작스런 죽음이 현덕왕후의 저주라 여긴 세조가 명령을 내려 현덕왕후 능침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안내표지판에 ‘능이 다른 곳에 이장되었다’가 그 일을 에둘러 말한 것이리. 

  

  현덕왕후는 중종 대에 이르러서야 문종 혼자 배향된 게 민망하다는 신료들의 거듭된 의견이 받아들여져 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문종 능 동편으로 이장되었다. 원래 문종 능과 왕후의 능 사이에 큰 수풀이 가로막혀 있었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능이 온 뒤부터 그 숲의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데…….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무덤으로 마주한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을 부부. 지금쯤은 다 잊고 안식을 찾았으려나. 

  “아, 영월에 있는 단종 무덤이라도 이곳으로 옮겨와 부모 발치에라도 묻어줘야 했던 거 아닌가. 이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옮기기도 쉽지 않을 텐데. 현덕왕후 능 옮길 때 같이 옮겼으면 좋았을걸.”

   부질없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중얼거려 보았다. 

   현릉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쪽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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