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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Feb 21. 2024

건조기 안에서 빨래를 꺼내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들었던 과거의 일상과 비교했을 때, 살림하는 사람들의 수고는 말로 할 수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 쌍둥이를 낳으신 어머니가 아이를 키울 때만 해도 세탁기는 물론이거니와 냉장고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입이 떡 벌어지게 탄성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세탁기 없이 사셨어요?

어떻게 음식을 보관하셨어요?


제사가 없는 집 안도 아니었다. 때마다 제사가 돌아오면 음식을 해야 하는 어머니의 손길은 바빴다. 가스레인지도 없던 그 시절, 연탄불에 전을 부치고 음식이 상하지 않게 제사 직전에 음식을 만들어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일이었다. 배고픈 시절이라 음식을 보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먹성 좋은 아이들 덕분에 냉장고는 필요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시아버지도 살림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질러놓은 기저귀를 퇴근해서 돌아오신 시아버지가 뜨거운 물에 빨아 너는 일을 도와주셨다고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도 힘든 줄 모르고 살림을 이어가셨다고 했다.


지금은 살림하기 참 좋은 세상이다. 비약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빨래는 세탁기가 알아서 해주고 건조대에 너는 수고없이 건조기가 싹 말려주고 있으니, 분류해서 돌리는 일만 한다면 힘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집안은 깨끗한가?


그렇지 않다.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 뒤에 숨어 효율적으로 미룰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 빨래가 쌓여서 밀리면 어쩔 수 없이 세탁기를 돌린다. 이염시트의 개발로 세탁물을 분류하지 않고 돌려도 되니 몰아서 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개발품은 없을 것이다. 한차례 돈 빨래가 건조기에서 마르면 두 번째 빨래를 넣어 건조하기 전까지 건조기 문은 열리지 않는다.


건조기를 처음 샀을 때는 빨래가 구겨질까 봐 울 기능으로 한 번 더 돌리는 수고를 해가면서 따뜻할 때 탁탁 털어 반듯하게 개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건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구김이 있는 옷도 개 놓으면 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한 남편도 이제는 옷을 한 치수 크게 사서 건조기에 돌려 맞춤형 옷을 입는 쪽을 택한다. 세탁을 잘하지 못하는 아내때문에 자연건조한 옷에서 냄새 나는 경우가 많으니, 건조기에서 구겨지고 줄어든 옷을 입기로 택한 것이다.


설거지도 싫지만 빨래가 바로 되지 않고 하기 싫은 이유는 꽉 차 있는 옷장이 한몫을 한다. 미니멀 리스트였다면 옷을 개서 넣을 넉넉한 공간에 손쉽게 넣을 텐데, 옷을 넣을 때마다 기존에 옷들을 옷장 벽으로 바짝 밀어야 넣어야 하는 수고가 싫다. 매년 사촌들의 옷을 받고 입지 않는 옷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맥시멈리스트에게  빨래 기보다 싫은 것이 빨래를 집어넣는 일이다.


자매를 키우다 보니 이런 수고가 더 쌓인다. 2년 터울이라 입는 사이즈가 애매하게 다르다. 발육이 좋은 딸들이지만 타이트하게 옷을 입는 큰 아이와 넉넉하게 입는 막내가 같은 사이즈를 입기도 한다. 그렇다고 각자의 사이즈 별로 옷을 분류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매번 옷을 개서 정리하는 일에 골머리를 섞기 일쑤다.


모든 것이 푸념이다. 결국 이건 게으름을 포장하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살림을 제 때 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고 싶다. 왜 이렇게 미루는지 결혼 10년 차가 될수록 부지런해지기보다는 짬나는 시간에 나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다른 주부들의 일과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주로 하는 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개인적인 취미 활동과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오전 시간이 꽉 차서 정신없이 지나갈 정도로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마을 주민들과 지원사업을 꾸려간다던지 온라인 그림 그리기 모임 사람들과 그림 그리기를 하는 일들을 채우고 나면 어느덧 아이들이 올 시간이다. 결국 오후가 돼서야 아이들을 챙기고 살림을 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느긋하게 살림을 한 적이 언제였나 싶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집안 살림을 더 신경 쓰기보다 내 안을 채우는 일에 부지런을 떨고 있다. 기술의 발전을 이용하여 미룰 수 있는 살림을 최대한 미룬 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가면서 엄마보다는 나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워킹맘의 일상을 보게 되었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비애가 그대로 드러났다. 일을 하면서도 아이의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워킹맘들은 말 그대로 자신을 돌보는 일은 뒷전이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아이와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가꾸는 일에 멀어져 갔다. 자신이 우울증에 걸린 사실조차 모른 채 병들어 가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자서전을 써보라는 처방을 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정적인 언어들에 형광펜을 치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기뻤던 순간들이 아이를 낳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형광펜으로 도배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본인이 힘든지 조차 몰랐던 순간을 위험신호로 나타내는 형광빛을 통해 직시하게 된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신경 쓰면 아이가 더 잘 될 텐데"

"내가 지금 조금 더 벌면 아이를 좋은 학원에 보낼 수 있을 텐데"

"내 새끼가 나 때문에 친구도 못 사귀면 어떡해요"


몸은 일하고 있지만 마음은 육아에 올인하고 있는 엄마들의 마음은 모두 같았다.


"너무 애쓰지 마, 너 힘들 거야, 모든 걸 다 해주고도 못해준 것 만 생각나서"

"네가 다 시들어가는 것도 모를 거야"

"인생이 전부 노란색일 거야, 노란불이 그렇게 깜박이는대도 모를 거야"

"아이 행복 때문에 네 행복에는 눈감고 살 거야"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면서 그 말을 참 잘 녹여냈다고 생각했다. 전업주부를 하고 있지만 아이의 픽업으로 바쁜 나의 생활을 돌아보면 워킹맘과의 경계가 없다. 내가 일을 나갔다면 누군가를 고용해서 픽업의 일을 대신해야 할 테니 돈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를 케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살림, 아이의 학업 코디네이터, 학원 픽업 등은 아이를 키우면서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내 경력과 직업을 잠시 미뤄두고 전업으로 맡아서 말이다. 그 일을 좀 더 즐겁게 하기 위해 짬이 나는 시간에 나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어차피 살림은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 발전된 기술을 이용해 요령을 피우는 것은 내 삶의 행복을 위한 현명한 게으름이라고 해야겠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고 우리 가정이 잘 돌아갈 수 있으니까. 건조 시간이 끝나서 바로 개어 서랍에 넣지 않으면 어때. 쌓여있는 빨래에서 양말을 찾았을 때 희열도 있는 법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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