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인 (遺棄人)

반 10년을 지낸 조직에서 철저히 버려진 유기인

by 아나스타시아

유기동물(遺棄動物): 주인이 돌보지 않고 내다 버린 동물


얼마나 가슴 아픈 존재인가. 주인이 돌보지 않고 내다 버린 동물. 하지만 유기인인 나는 어떨까?


5년 6개월을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더 이상 병들고, 상명하복 따위 따르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이니 내다 버린 조직의 일원. 나는 내가 나온 조직에서 과연 가슴 아픈 존재이긴 할까? 아니 먼지보다 못한 존재겠지. 이제 나온 지 반년쯤 됐으니 질겅질겅 씹어봤자 턱만 아프고 단물도 안 나오는 껌이겠지.


전 상사와 대차게 싸우고 나온 나는 공직사회 기강을 무시하고 새내기 직원들의 sos는 모조리 끊어버린 채 조직 기강을 해이하게 하고 과내 모든 팀들에게 민폐가 되었다.


사실 퇴사 직전 과내 다른 팀으로 자리 이동에 도전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었다. 자존감이 붕괴돼 가루가 된 나에게 그 자리가 과연 합당한가, 내가 감히 도전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인가 끊임없이 고민하다 결국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었다. (면접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자리에 가지 못했던 것은 신이 나에게 준 기회이자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 팀에 가더라도 당분간 이 팀 일은 해 주시고……",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게 그 팀 가는 거 믿고 이따위로 행동하는 겁니까?"라고 했던 그의 주옥같던 대사를 생각해보면 사실 상사는 내심 내가 그 자리에 도전하는 것을 굉장히 불쾌해했었던 듯하다.


사실 면접에 가기 싫었다. 쉽게 정신병자 소리 듣고 약 몇 알 먹으면서 동정표 얻고 한 달이나 스페인에서 띵가띵가 놀다 온 사람. 업무 도중 코로나-19 확진 기자와 접촉해 운 좋게 집에서 2주나 띵가띵가 놀다 온 사람. 그딴 취급을 받고 관둔 회사의 다른 팀에 간다고 그들을 만나지 않을 것도 아니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네 마음이 제일 우선이라고 사직서 잘 내버렸다고 토닥여주신 분, "Be ambitious! 야 한 번 해봐!"라고 응원해주신 분들을 위해서, 이게 내가 그분들을 위해 보여드릴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충성이었기에 밥 한 술 뜨지 않고 약만 탈탈 털어 넣은 채 면접을 보고 나왔다. (면접에 후회는 없었지만 후일담으로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 공지에 없던 2차 면접을 보게 됐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시면 이렇게 행동하실 건가요? 원래 있던 팀원 분들이랑은 어떻게 지내실 건가요? 아시겠지만 사직서 쓰시고 남은 연가 소진하는 동안 우리 팀에도 피해 많이 왔어요. 당신 안고 가는 거 우리 팀한테도 상당히 리스크인 거 알고 있죠?", "당신 때문에 과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어쨌든 우리도 앞으로 인원 차출할 때 그 팀에 아쉬운 소리 해야 할 텐데 이대로 지낼 순 없잖아요.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본인도 지금 본인이 열심히 희생해가며 일했던 모습들은 지워지고 동료 직원 외면하는 사람 되는 거... 원치 않죠? 돌아오면 그런 감정 푸는 자리 한 번 만들어요."


공지에는 2차 면접은 기재되어있지 않던데요?
면접인지 협박인지 분간도 안되네요. 가보겠습니다.


어차피 떨어질 거 속 시원하게 그냥 듣지나 말고 올걸. 머릿속으로만 저렇게 외친 채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을 대성통곡을 했다. 왜 나는 잔정이 있을까? 왜 나는 사람을 믿을까? 왜 나는 저 사람들을 좋아했을까? 사회에서 만난 사람을 믿은 내가 바보지. 또 내 탓을 했다.


며칠 뒤 탈락을 확인하고 나서는 더욱 괴로웠다. 붙고 관둬야 했는데, 그렇게 저 팀 일을 스무 번도 넘게 했으면서 그 면접 하나를 못 붙어 탈락하는 내가 너무 못나고 한심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심 가질 안도감과 약간의 동정심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거기다 아주 공교롭게도 내가 사직서를 던진 날부터 연락을 끊어버린 옛 동료들과, 2차 면접자였던 직계 선배와의 단절은 '사람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훌륭한 교훈을 내게 남겨주었다.


마지막 출근날, 그나마 사회생활에 연륜이 있으신 두어 분만 간단하게 오셨냐고 인사를 해주셨다. 그리고 서무 직원이 나에게 텅 빈 사직서를 내밀었다.

가짜 사직서.jpg
팀장님께서 사직원 주고 가셨어요.
날짜는 적지 마시고 이름이랑 싸인만 해서 주시면 돼요


일신상의 사유라. 일신 상의 사유가 생기긴 했지. 회사 때문에 공황장애와, 중등도 우울증과, 6개월의 생리 중단과 세 개의 자궁근종이라는 사유가 생겼지. 그런데 그게 누구 때문에 생겼을까? 마지막까지 본인의 "일신"에 영향을 주진 않을까 사기를 치는 30년 차 만기 공무원의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서둘러 마지막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고, 몇몇 분들께만 메신저로 인사를 드리고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허공에 대고 말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내 인사는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받아주었다.


멋지게 던졌던 내 사직서는 어디로 가고, 조작된 사직서로 나의 중앙부처 소속기관 생활은 마무리되었다.


버려진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앞으로 텅 빈 많은 것들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 그리고 당장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직업 훈련소라도 들어가야 하나. 그럼 난 지난 6년에 가까운 커리어는 버려야 하는 건가. 심란한 마음을 안고 괜히 가까운 광화문역을 두고 터덜터덜 정동길을 걸어 서대문으로 갔다.


좀 쉬자.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아 코로나만 아니면 스페인이나 갈 텐데.

남들은 퇴사하고 세계일주도 하고 뭐도 한다는데 나는 찌질하기 짝이 없네. 코로나 때문일까 나 때문일까.

정말 정말 날 아껴주는 사람들은 잘했다고, 맘고생 많았다고 좀 쉬라고 하는데 마음은 왜 이렇게 불안한지.


그렇게 불안한 마음에 며칠을 그냥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공허한 시간을 보내던 내게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만나봤습니다.
[김희수(가명)/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사직서 작성해주세요. 퇴직 사유는 일신상의 이유로 퇴직한다고 쓰면 된다'고 했어요. 어떤 부분이 제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냐고 했더니 근거로 드는 얘기가 '키보드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라던지."
("동료 중에 아예 실업급여 신청조차 못 하신 분도 있다고?")
"괴롭힘에 못 이겨서 나가겠다고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팀장님이 '이 업계 좁은 거 알지 않느냐. 분란 만들지 말고. 조용히 나가라'고.
지역 고용노동청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퇴사 후에 확인된 일이라 실업급여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0.5.30, MBC 뉴스 [로드맨] "절실한데 못 받는다" 실업급여의 조건)


아직도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노동청과의 전화 내용. 수십번 들어도 아픈 그 말.


"직장 내 괴롭힘이 맞으시고요, 괴롭힌 당사자가 공무원이라고 하셨죠? 그러면 인사상의 불이익이 있을 수 있고..."


"그분이 다음 달에 퇴직이시거든요..."


"아...그럼 방법이 없네요"


"전 그냥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데, 그것도 안되겠죠?"


"네...현재 법안으로썬..."



이 초라하게 내버려진 백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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