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나

by 평일
순애 브런치.png

남자는 왜 여자를 소유하려 하는 걸까.

소유한 여자에겐 흥미를 잃어버리고, 어째서 소유하지 못한 여자는 쉽사리 성녀로 혹은 창녀로 만들어버리는 걸까.

순애는 대단하지만 혐오스러운 여자다. 아니, 대단히 혐오스러운 여자라고 정정하는 편이 낫겠다.

대단한 이유라면 내가 갖고 싶은 여자였으니까.

혐오스러운 이유라면… 결국 가지지 못한 여자니까.


써 본 적 없는 글이지만, 글을 한 번 써 보기로 했다.

둥둥 떠다니는 형체 없는 막연한 혐오를 또렷이 보기 위하여.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1.

모쪼록 쓰게 된 글이니,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고자 한다.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예정일보다 빠르게 태어났다. 출산 예정 일주일 전 새벽에 엄마는 갑작스러운 산통을 느꼈고, 덕분에 우리 집은 왈칵 뒤집어졌다.

폐에 물이 약간 차 있었던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었고, 뭐 그 이후에는 건강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것 없이 자랐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 대한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면, 나는 그렇게 방실방실 잘 웃는 아이었다나. 지나가는 사람을 봐도 웃고, 혼을 내도 빙그레 웃기만 했기에, 혼을 내도, 영 혼내는 기분이 아니었단다. 아마 평생 지을 웃음을 이때 몽땅 끌어다 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이건 좀 억울한데.

유치원에 다닐 시절에는 이렇다 할 커다란 기억이 없다.

뭐랄까, 그 당시는 기억보단 감정만 편린처럼 남아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려나

유치원에 다닐 때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몸이 간질거린다고 표현하곤 했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이었으니, 나름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처럼 그 당시에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외롭다고 표현하지 못했고 '물고기가 된 기분이야.'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왜 하필 물고기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꽤나 단순하다. 우리 집에서는 작은 구피를 한 마리 키웠었는데, 밤에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 불을 켜면, 그 불빛에 비친 구피의 모습이 참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님에게 "물고기가 된 기분이야." 라는 말을 하면,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그 나이에서는 나올 수 없는 그럴싸한 표현이라며 좋아했다. 그건 외로움이었는데.

지금 와서 '몸이 간지러우니 저랑 연애하실래요?'라고는 말할 순 없지만, '물고기가 된 기분이야'라는 말은 종종 하곤 한다. 인정하긴 싫지만, 꽤나 그럴싸한 표현이니까.


2.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외로운 감정을 느껴야 했던 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당연하게도 현실적인 이유였는데,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였고, 엄마는 사업을 하는 아빠보다도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외로움을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내 몸은 언제나 간질거렸으니까.

특히 엄마는 사랑이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나를 꼭 안아 주고 나면, 내 몸에 끈적한 꿀이 묻어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만큼 그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몇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워낙 사랑이 흘러넘칠 정도로 많았던 사람인지라 그 흘러넘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빠와 나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다는 게 그랬고, 아주 어렸던 내가 봐도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고 느낄만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봐 버렸다는 게 그랬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즈음 여름에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사실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내 외로움을 들켜 버려서 이렇게 됐나 싶은 마음에, 할 수 있는 건 나를 계속 탓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들켜버린 건 나의 외로움이 아닌, 엄마의 외로움이었다는 걸 이해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할매와 살 때도 2주에 한 번씩은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엄마를 만나면, 엄마는 항상 햄버거를 사 줬다. 같이 살 때는 건강에 안 좋다고 못 먹게 했으면서.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 앞 햄버거집에서 엄마를 만났다.

- 요즘에도 많이 바빠?

- 응, 너무 바쁘네.

- 나 안 보고 싶어?

엄마가 내 물음에 대답을 주지 않고선, 감자튀김을 집었다. 먹진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 맛있는 감자튀김을 왜 먹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다 먹었니?

- 응.

- 엄마 먹은 거 치우고 나갈게, 먼저 나가있을래?

엄마가 쓰레기를 모아서,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유리창을 통해 본 엄마의 어깨가, 쓰레기통 앞에서 묘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길게는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오다가 발걸음을 아예 끊어버렸다.

그닥 슬프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사랑해 마지않는 할매가 있었으니까.


3.

보통 나에 대한 얘기를 여기까지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종류로 나뉘곤 했다. 첫 번째는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

동정심의 또 다른 말은, 책임 없는 따뜻함이다. 앞으로 풀어 나갈 이야기들을 위하여 미리 솔직해지자면, 나는 이들이 건네는 따뜻함을 즐겼던 때가 있었다. 그런 부류의 따뜻함은, 할매가 건네는 것과는 또 다른 무언가였으니까.

이어서 책임 없는 따뜻함의 다른 말은, 우월감이다. 나의 상황이 저 사람이 처한 상황보다 낫다는 그런 종류의-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축구부에 들어가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심하게 내성적이었던 나를 개조하기 위해 세운 할매의 특단의 조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매의 선택은 반은 성공이었고, 반은 실패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작은 재능이 축구 쪽에서 발현되어 준 덕에, 나는 의외로 그 무리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리에 완전히 녹아들기 위해서는, 이것저것들을 세금처럼 꼬박꼬박 내야만 했다.

대표적으로는 친구들끼리 한 번씩 돌아가면서 사는 떡꼬치 값이나 제티, 또 운동이 끝나고 남는 시간에 운동장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하는 얘기들이 그랬다.


이야기는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빠르게 부풀어 오른다. 무심코 말을 뱉고 며칠 뒤, 엄마는 아빠를 무참히 살해하고 도망간 도망자가 되어있었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론, 나 역시도 어항 속에 불쑥 들어온 손을 보고 놀란 물고기처럼, 사람을 피해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