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소녀

나와 정아

by 평일

19.

이성적인 감정은 사람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만들거나,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만든다.

문제가 있다면, 두 쪽 다 그걸 받는 입장에선 티가 잔뜩 난다는 것이다.


20.(나와 정아 / 탄생)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정아는 나랑 같은 반이었는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탓에, 종종 등하교를 같이 하곤 했다. 그렇게 등하교를 같이 할 때면, 정아는 나에게,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주었다. 어떤 날은 사탕이었고, 어떤 날은 젤리, 어떤 날은 조그마한 과자 같은 것들이었다.

그날은 여름방학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날이 무더웠던 탓에, 나는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갈 계획이었다. 방학식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교실 문을 나서려던 참에, 정아가 날 불러 세웠다.

- 야!

- 어?

- 집 가?

- 응.

- 같이 가자.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대략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통학을 하던 길은, 가로수조차 한 그루 심어져 있지 않았던 심심한 길이었기에, 길을 걷는 맛도 없었거니와 여름이 되면 몸이 타들어 가는듯했다.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통학 길을 걷는 동안, 정아는 언제나, 지치지도 않고 내 옆에서 재잘재잘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 방학 때 뭐 해? 어디 놀러 가?

- 아니, 뭐 딱히 계획 없는데.

- 아 그래?

말을 마치자, 정아가 갑자기 가방을 앞으로 들쳐 매더니, 가방 앞주머니에서 막대사탕 두 개를 꺼냈다.

- 먹을래?

- 오, 땡큐.

사탕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사탕을 오물거렸다. 나는 사탕 중에서, 딸기 사탕을 가장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아이는 나에게 항상 딸기 사탕만 쥐어 주었다.

- 방학하면 먹을 거 줄 사람 없어져서, 어떡해.

- 야, 나도 사탕 사 먹을 돈 정도는 있어.

- …그거야 그렇지.

정아가 막대사탕을 까서, 오물거렸다.

- 할 거 없으면, 도서관 와.

- 왜?

- 사탕 줄게. 딸기 사탕으로.

- 음… 고민 좀 해 보고.

물론 공부나 책을 읽는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나는,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 갈 일은 없었다.


21.

여름방학이 끝난 개학날 의도치 않게 정아를 아파트 정문에서 만났다. 그 아이는 날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는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더니 내 옆으로 와서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재잘거리며 이것저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 오랜만.

- 그러게 오랜만.

- 얼굴이 좀 탔네. 어디 놀러 갔다 왔어?

- 엥? 딱히 어디 안 갔는데. 너는? 어디 놀러 갔다 왔어?

- 나는 뭐, 거의 맨날 도서관에 있었지.

- 근데, 너 도서관 왜 안 왔냐. 진짜 한 번을 안 오더라? 나는 매일 갔는데.

- 책 읽는 거 싫어해서.

- 사탕 준다니까…

어이가 없었던 탓에 웃음이 픽 하고 나왔다.

- 사탕 하나 받자고, 도서관까지 가냐. 20분은 걸어가야 되는데…

이야기를 들은, 정아가 내 팔을 때렸다. 얼얼할 정도로 세게.

- 아, 뭐야. 갑자기 왜.

- 이제 너 사탕 안 줄거야.

- 뭐야, 왜.

- 몰라.

손가락으로, 정아의 팔을 콕콕 찔러댔고

- 왜 안 봐. 볼 때까지 계속한다?

정아의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 맛있는 거 주려고 했는데. 되게 아쉽게됐네.

- 뭐 줄 건데.

- 어…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정아가 참지 못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그게 뭐야.

- 뭐 먹고 싶은데?

- 음… 치킨?

- 뭐야, 그럼 내가 완전 손핸데?

- 그럼 말아.

정아가 나를 앞서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정아를 쫓아 걸어갔다.

- 농담이지, 농담. 사줄게. 화내지 마, 내가 미안해.


22.

물론 정아는 좋은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딱 잘라 말하자면 내가 정아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은 이성적 호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아를 보통의 여자아이들처럼 대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아는 모든 부분이 가장 이상적인 평균 수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장, 학업 성취도, 외모, 입맛, 성격, 취미, 건강, 부모님의 유무와 그 부모님의 성향까지도… 모든 것들이 자로 잰 듯 딱 평균에 있던 정아는 평균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내가 보기엔, 되려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필요했다. 딸기 사탕이야, 내가 돈을 주고 얼마든지 사 먹을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 아이가 나에게 물어오는 가장 평균의 질문들과, 내 질문에 돌아오는 가장 평균의 답변들은, 정아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23.

사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가장 먼저 하루에 두 번 할매가 요리를 할 때 보조역을 맡는 것. 할매는 요리를 잘 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에서는, 비가 오면 파전을 먹어야 했고, 눈이 오면 단팥죽을 먹어야 했다.

할매는 나에게 주방에서의 이것저것들을 알려주었다. 올바른 방식으로 칼을 쥐는 법이라던가, 채소의 보관 방법, 똑같이 검은색을 띈 간장들이지만 제각각 사용법이 다르다는 것, 불 조절을 하는 방법등을.

나는 요리에 흥미가 크게 없었던 탓에, 이 시간이 썩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할매랑 있는 시간은,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했으니까.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회사에 가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회사에는, 직원들이 20명 정도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맡은 역할은, 회사 청소와 스무 명분의 커피를 타서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나중에 이 회사에 들어오려면, 아무것도 없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늘상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아버지가 말했던 그 ‘처음’에 대한 연장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가는 회사 등산 모임에 참여하는 것.

축구부를 그만둔 이후로, 운동에 대한 흥미를 모조리 잃어버린 나로서는 매주 주말마다 등산을 가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회사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면, 전혀 타협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깨어 있을 수 없는 아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고, 내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을 하셨다. 따라서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내가 회사로 출근을 하거나, 주말에 등산을 갔을 때뿐이었지만 그나마도 아버지의 얼굴은 스쳐 지나가듯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아니 어느 순간부턴 웃지 않게되었다. 예전엔 내가 웃으면 따라서 방긋 웃어주시곤 했었던 것같은데.

아버지가 무섭다는 생각은 딱히 해 본 적 없었지만, 왠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면, 무서운 선배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높임말이 나왔다.


24.

위에 나열한 일들을 하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을 대부분 자는 데 사용했다. 마음 같아선 자는 데에만 쓰고 싶었지만, 유철이가 온종일 나를 불러댔던 탓에 그럴 순 없었다. 아, 그 친구 이름이 유철이는 맞았던가. 아무튼 일단 편의상 유철이라고 부르겠다.

유철이는 그 당시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다. 친구는 맞았나? 사실 그 시절 기억은 정아와 관련된 게 아니라면 가물가물하다.

방학이 절반쯤 지났을 시점에 그 녀석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대뜸 섭섭함을 토로했었지.

- 시간 좀 내 봐, 얼굴 까먹겠어. 방학하고 한 번도 못 봤잖아.

- 바빠서 못 나간다니까. 시간 나면 연락할게.

- 뭐가 그렇게 바쁜데.

- 요리도 도와줘야 하고, 일도 도와줘야 돼.

- 요리는 엄마가 하고, 일은 아빠가 하는데, 너가 왜 바빠.

- 아, 새끼야. 바쁘다고, 시간 되면 나간다니까? 왜 이렇게 보채.

- 이번 주말에 나와라.

- 시간 보고.

- 너 계속 이러면, 곁에 아무도 안 남는다니까. 너 걱정돼서 그래.

'쓰다'라는 동사는 돈이나 마음, 시간같이 무언가 유한한 명사 뒤에 붙기 마련이다.

그렇다는 걸, 처음 알아차린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쓸 때가 아닌,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유철이와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가 끝나고 나서, 문득 엄마가 나로부터 도망친 이유는, 엄마가 나에게 쓸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을 다 써버려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유철이에게 쓸 수 있는 마음을 다 썼기 때문에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엉겨붙던 그 애로부터 도망친 것처럼.


25.

- 엄청 덥네. 얼른 들어가자. 어떤 거 먹고 싶어?

- 너는 어떤 거 먹고 싶은데?

- 내가 너 사주는 거니까 네가 골라야지.

- 떡볶이 먹을래?

- 어, 뭐 그래.

- 별로야?

- 아니? 나도 떡볶이 좋아해. 떡볶이 먹으러 가자.

떡볶이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즈음에, 정아는 떡볶이 2인분을 더 주문했다.

- 다 먹을 수 있어? 엄청 잘 먹네.

- 이건 포장해 갈 거. 우리 부모님도 떡볶이 엄청 좋아하시거든. 너도 포장해서 부모님 좀 드려. 이건 내가 사줄게.

- 아, 나는 괜찮아. 어차피 포장해 가도 먹을 사람 없어.

- 왜? 바쁘셔?

- 응. 두 분 다 자주 못 봐.

- 아… 아쉽네. 여기 진짜 맛있는데

- 줘, 그것도 내가 살게.

- 아냐, 이건 내가 살게.

- 원래 뭐 살 때는, 확실하게 사줘야 상대방 기억에 남아.

정아가 웃었다.

- 왜 웃어?

- 배불러서.

- 배부른데 왜 웃어?

- 기분 좋잖아.

- 너는 왜 웃어?

- 그냥, 너무 웃기기 쉬운 사람이다 싶어서

- 뭐야, 그럼 안 웃을래.

- 아니야, 많이 웃어. 너는 웃는 게 훨씬 잘 어울려.

- 그런 말 막 쉽게 하는 거 아니야.

- 웃기기 쉽다는 말?

- 그래, 그런 말.


26.

정아에게 밥을 사주고 난 이후로, 정아는 나에게 더 많은 것들을 주려고 했다. 원래는 한 개씩 주던 딸기 사탕에, 젤리까지 덤으로 얹어 준다거나, 내가 하굣길에 물었던 질문에 대한 자세한 답변이라며 종종 저녁에 걸려오는 전화가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정아에게 건네는 마음의 양이 1이라면, 정아가 나에게 건네는 마음의 양은 2에서 3으로, 3에서 5로 늘어갔다. 학교에선 우리가 이미 사귀는 사이인 줄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특히 정아의 친구들이 더 유난이었다.

- 야! 너 정아랑 언제 사귈 거야!

라고 물어보면

- 정아한테 한 번 물어봐.

라고 빙그레 웃으며, 정아에게 답변을 미루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몰랐기에 답변을 유보한 것뿐이었는데, 내가 이런 대답을 할 때면, 정아의 친구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돌아갔다.

- 나한테 물어보라고 했다며.

그 날 하굣길에, 정아와 좋아하는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뜬금없는 타이밍에 정아가 주제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 어? 어떤 꽃 좋아하는지?

당황했던 나는 원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주제로 돌아오려 애썼지만, 잘되지는 않았다.

- 언제 사귈 건지.

- 아… 갑자기…?

정아가 내 앞으로 와 한 바퀴 빙그르 돌아, 날 마주 보며 걷기 시작했다.

- 야 위험해. 앞에 보고 걸어.

- 그래서 애들이 물어봤어?

- 물어봤지.

정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대답도 했어?

- 응, 대답도 했지.

- 뭐라고 했는데?

장난기가 오를 때 그 애의 눈은 평소보다 살짝 커진다. 웃을 땐 입꼬리 밑으로 보조개가 생겼는데, 그 보조개는 조금 귀여웠다. 정아가 오른손을 쫙 펴서 내 앞으로 보여주었다.

- 5개월?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 5일?

정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접어 가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 오… 사… 삼…

정아의 의도를 이해했던 건, 정아의 손가락이 세 개쯤 접혀 있을 때였고. 처음으로, 어쩌면 정아가 평균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 그거 다 세면, 우리 사귀는 거야?

내 말을 들은 정아가, 세던 숫자를 멈추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 뭐, 귀신 봤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협박하는 거 같잖아.

- 그럼 언제라고 했는데?

정아가 돌아서서,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 조만간.

- 우리 조만간 사겨?

- 응, 조만간 우리 사겨.


27.

- 너, 나 좋아해?

- 응, 좋아하지.

- 너는 나 안 좋아해?

-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 근데 왜?

- 내 어떤 부분이 좋은 거야?

- 좋은 점을 나열하는 거보단, 안 좋아하는 부분을 말하는 게 훨씬 빠르겠는데?

- 안 좋아했던 부분은 뭔데?

- 딱히 없는데?

정아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 에이, 장난치지 말고.

-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여?

- 그건 아닌데, 혹시 화… 났어?

정아가 내 팔을 잡고 웃었다. 이번엔 때린 게 아니라 잡았다.

- 아니, 왜 이렇게 겁을 먹었어. 내가 너 잡아먹어?

- 그냥 궁금해서. 누가 이렇게 나 좋아한다고 한 적이 처음이라.

- 아 진짜? 의외네.

- 그런가.

- 너는,

- 너는 다정하고, 잘생겼잖아.

- … 잘생긴 건 조금 인정.

- 뭐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 뭐야, 잘 가다가 이러기야?

정아가 우뚝 멈춰 서서, 날 가만히 올려다 봤다. 시선을 축 늘어뜨리더니 고개를 숙여, 나에게 기댔다. 정아의 이마와 내 갈비뼈가 맞닿았다. 정아가 웅얼거렸다. 웅얼거림이 떨림으로 맞닿은 갈비뼈를 타고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몸이 간지러웠다.

- 우린 잘 어울리잖아.

- …

- 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그게 무슨 뜻이야?

- 너 말이 맞다는 뜻이야.


28.

정아의 말은, 곧 사실이 되었다.

정아와 나는, 가을의 초입부에서 사귀기 시작했다. 거리낌 같은 건 없었다. 정아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이니까. 정아의 생각이 가장 평범한 영역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면, 그 영역에 함께 걸터앉아 있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9.

정아와 사귀고, 가장 처음에 한 것은, 애칭 정하기였다.

정아는 꽤나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해댔다.

- 경상도에서는, 이름 부를 때 끝자리에 '야'만 붙여서 부른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우리 외가 쪽은 다 경상도 사람들이었고, 엄마도 나를 그런 방식으로 불렀었으니까.

- 응, 맞아.

- 그럼 나는 '아야'야?

정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음… 그냥 '정아야'라고 부를 것 같은데…

- 신기하네. 이거 마음에 든다. 이걸로 우리 애칭 할까? 우리도 애칭 하나는 있어야지.

- 에이, 여기가 경상도도 아니고.

- 왜, 별로야?

- 응응, 좀 지겨워.

- 그럼 성에다가 '아' 붙이는 건 어때? 나는 '민아' 이렇게.

- 그게 마음에 들어?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럼 그러자.

- 그럼 너는 '하아'야?

- 아니? 나는 '하야'라고 불러야 돼. 말하고 나니까 좀 이상하지 않아?

- 완전 마음에 드는데? 불러봐. 빨리

- 나 부끄러운데.

- 빨리 해봐.

- 민…아…

정아가 날 빤히 쳐다봤다.

- 이번엔 내가 앞으로 갈 테니까, 뒤에서 부르는 거야. 알겠지? 크게 불러야 돼?

정아가 곧장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내가 못 미더웠는지, 굳이 뒤를 돌아 확인까지 했다.

- 이해했어?

- 응응, 이해했어, 민아.

정아가 흡족한 듯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하야.

- 응?

정아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 때 정아의 기분은 좋았고, 내 기분은 묘했으니까. 엄마 생각이 났다. 이젠 가물가물한 엄마 생각이.


30.

처음 해 보는 연애는 생각보다, 별게 아니었다.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적게 한다면, 그렇게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정아는 길거리에 피어 있는 꽃을 보는 걸 좋아했다. 길가에 핀 들꽃과 마주친다면,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고 옆에 쭈그려 앉아, 꽃의 이름을 알아내야 했다. 추측하기론 정아의 아버지가 꽃집을 하고 계셨기에,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또 정아는 카페에서 음료를 시키면, 꼭 시럽을 3번 정도 더 넣어서 마시는 걸로 미루어 보아, 달콤한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다. 반대로 싫어하는 건, 크게 없었다. 한 가지 있었다면, 정아는 연락에 있어서 예민한 부분이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일찍 자버리는 바람에 저녁에 건 전화를 받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하루 종일 입이 툭 튀어나와서는 막대사탕 3개에, 커다란 초콜릿을 안겨 주고서야 정아의 기분을 간신히 풀어줄 수 있었으니까.

내 입장에선 정아와의 연애에 있어서, 좋고 싫은 게, 크게 있진 않았다.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정아 쪽에 있지 않았다.

나는 정아와의 스킨십이 힘들었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스킨십이 별게 있었겠냐마는, 손을 잡는 것도, 껴안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들이었다. 손을 잡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껴안는 건 말이 달랐다.

정아가 나를 안을 때면 엄마 생각이 났다. 정아에게서, 엄마의 온도와, 엄마의 향이 나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정아가 날 껴안고 나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내 몸에 끈적한 감정이 남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31.

우린 3학년이 되고 반이 갈라졌다. 나는 3반으로, 정아는 4반으로. 바로 옆 반이긴 했지만, 정아는 상심이 큰 듯했다.

- 반이 갈라지는 게 당연하지, 정아야. 대충 확률적으로 봐도 그런데

- 그건 그렇지. 그래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정아는 불안했는지 나에게 이것저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반에서, 자리를 바꿨는데, 옆자리가 여자애야. 근데 너한테 반갑게 인사를 하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될까?

- 안녕?

- 미쳤어?

정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살벌하게 노려봤다.

- 냅다 뺨을 때릴 순 없잖아…

- 차라리 그렇게 해.

- 그럼, 그 여자애가 너한테 맛있는 거 준다고 하면?

- 오…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

- 미쳤어?

정아는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 농담, 농담.

- 다시 해봐.

- 받자마자 바로 땅바닥에 집어던져야지. 그리고 오렌지 맛 사탕? 나는 딸기 맛 아니면 안 먹어.

정아가 내 말을 듣고, 흡족했는지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이 정도 답변이라면, 정아도 충분히 만족했지만, 이젠 내가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

- 너 정아 친구들 완전 무서운 거 알지? 너 어디 가서, 나 아는 척했다고 하면 죽어.

정아가 내 말을 듣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내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정아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어서 그랬던 건지 잘 모르겠다. 정아의 노력 덕분에 정아와 나는 반이 떨어져 있어도 크게 싸우지 않았다. 변한 게 하나 있다면, 정아가 내가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알아차렸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물어오지 않았다. 그게 많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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