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소녀

나와 정아

by 평일
순애 브런치.png

32.

- 밖에 비 엄청 많이 오네.

- 나 비 오는 날 엄청 좋아하는데.

- 으,,, 비 오는 날을 왜 좋아해.

- 비 소리 듣는 거 좋잖아. 아 물론 비 맞는 건 별로 안 좋아해.

- 비 오는 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파전, 달팽이. 하나, 둘, 셋.

- 파전. / - 달팽이.

- 비 오는 날은 무조건 파전이지.

- 무조건 달팽이지.

- 왜 달팽이야?

- 달팽이 귀엽잖아.

- 그게 뭐야ㅋㅋㅋ

- 너는 나중에 크면, 어떻게 살고 있을 거 같아?

- 직업을 물어보는 거야?

- 아니, 그냥.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되어 있을 거 같은지.

- 생김새? 일단은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고···

- 아니 그런 거 말고ㅋㅋㅋㅋ

- 음··· 일단,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울 거야.

- 좋네.

- 또···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 그것도 좋다.

- 안 좋은 일들이랑, 좋은 일들이랑 적당히 섞여서 일어났으면 좋겠고.

- 음··· 중요하지.

- 돈은 필요하긴 한데, 또 막 그렇게 많이 벌 필요는 없어. 많이 벌려면, 많이 바빠야 되니까.

- 그럴 수 있지.

- 이 정도?

- 그게 다야?

- 응, 대충 생각했을 때는? 근데, 갑자기 왜?

- 아냐 그냥 궁금해서

- 되게 뜬금없으시네요.

- 내가 좀 그런 경향이 있지.

- 근데, 나는 비 오는 날에 파전은 아직도 인정 못 해.

- 그럼, 그냥 달팽이로 할까?

- 그럼. 비 오는 날은 달팽이지.

- 그런 걸로 하지 뭐.

- 이제 갈까?

- 벌써 가?

- 응, 졸리다.

- 집 가면 전화할까?

- 아니야, 오늘은 잘래. 너무 피곤해.


33.

거짓말을 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정아가 묻는 질문에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 하야, 너네 어머님은 어떤 꽃 좋아하셔?

엄마의 얼굴도 가물가물했던 당시의 내가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알 리가 없었지만,

- 음··· 우리 엄마 장미 좋아하는 거 같던데, 잘 모르겠네. 아마 장미 좋아할걸?

- 아 진짜?

- 응, 근데 왜?

- 우리 집 꽃 집 하잖아. 꽃 좋아하시면, 몇 송이 드리려고. 이번에 화분 예쁜 거 많이 들어왔거든.

- 아, 아니야. 우리 집 맞벌이라, 꽃 관리할 사람이 없어.

- 에이, 받으시면 엄청 좋아하실걸? 내가 드렸다고 말하지 말고, 너가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샀다고 말씀드려.

얘기를 한 다음 날, 정아는 빨간 장미가 심어져있는 화분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화분을 본 할매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라며, 할매가 아끼던 담금주를 내 손에 들려주었다. 꽃을 받고 돌려보내는 선물로서 담금주가 적절한지에 대한 생각은 들었지만, 할매에게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대신 함께 건낼 초콜릿을 몇 개 더 샀다.

- 정아야, 이거.

- 이게 뭐야?

- 담금주. 엄마가 화분이랑 꽃 너무 감사하다고, 꼭 같이 전달해달래. 초콜릿은 내 마음.

- 내가 드렸다고, 말씀드렸어?

- 응, 했지.

- 왜 그랬어.

- 너 이쁨 받으라고.

정아가 내심 만족한 듯 웃으며, 폭 안겼다.

- 마음에 드신대?

- 응, 완전 마음에 드신대. 되게 좋아하시더라.

- 다행이다. 마음에 안 드실까봐, 걱정했는데.

- 무슨 그런 걱정을 해.

정아를 안고 내가 느꼈던 감정은 온통 걱정뿐이었다.

만약 정아가, 나의 엄마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때도,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선물을 준 사람이, 사실은 엄마가 아니라, 우리 할매였고, 그랬기 때문에, 선물로 꽃만큼이나, 예쁘고 낭만적 것을 돌려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래도 정아는 나를 좋아할까?

만약, 나도 정아랑 비슷한 곳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러니까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자랐다면, 엄마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결핍이 없었더라면, 이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 역시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문득 정아와 내가 서 있는 곳이 영영 같아질 순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 초콜릿보다 담금주가 훨씬 마음에 들어.

- 한 잔 하게?

- 우리 집에도 담금주 있거든. 몇 년동안 그대로 있는 거.

- 그럼 안 좋은 거 아니야?

- 아까워서 못 마신대, 담금주는 둘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나중에 커서 우리가 마셔버리자.


34.

- 정아야.

- 응?

바람이 살랑하고 기분 좋게 우리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그 바람에 정아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아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정아가 엷은 미소를 띠고 날 바라봤다.

- 너네 어머님은 어떤 분이셔?

- 우리 엄마? 좋은 분이시지.

좋은 어머니를 뒀다는 것보다, 고민 없이, 대답을 바로 할 수 있는 정아가 부러웠다.

- 그렇구나. 어머님이 좋은 분이셔서, 너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구나.

- 뭐야? 오늘 이상한데? 왜 이렇게 로맨틱해? 무슨 좋은 일 있었어?

- 원래 그랬구만 뭘.

- 아닌데, 오늘 유난히 훨씬 더 그런데

-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 그럼, 맨날 날씨 좋았으면 좋겠다.

- 근데 엄마는 갑자기 왜?

- 아니, 그냥.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

- 너네 어머님은 어떤 분이신데?

- 음…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야.

- 그럴 거 같았어.

- 미인이시지?

- 그건 잘 모르겠는데···

- 안 뵀지만 그러실 거야.

- 왜?

- 장미 심은 데에, 호박꽃 필 일은 없으니까. 너가 좋은 사람이니까 어머님도 좋은 사람이실 거야.

이상할 부분 없었던 정아의 말이, 나에겐 왜 이렇게 두려웠는지, 무서웠는지. 아마 넌 몰랐겠지. 그건 로맨틱한 나도 아니었고, 좋았던 날씨 탓도 아니었다는걸.


35.

- 너는 나중에 결혼할 거야?

- 우리 지금 16살인데?

정아가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턱을 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는 듯, 날 가만히 바라봤다.

- 음··· 아마, 아니?

정아가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 만약에, 우리가 30살까지 사겼는데, 내가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면?

점심으로 나온 새우튀김을 먹으려다, 잠시 멈춰서 대답했다.

- 우리는 30살도 아니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도. 만약에 그렇다면?

- 만약이 어딨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세상에서.

답을 해 줄 수 없는 질문에, 답을 요구하는 정아가, 이해 잘되지 않았다.

- 만약에 우리가 30살까지, 무사히 잘 살아있고, 내가 너랑 결혼이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 건데.

이번에 숟가락을 내려놓은 쪽은 내 쪽이었다.

-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의사표현이었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라는 일종의 의사표현.

- 아니야.

정아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 오늘 밥 되게 맛있네.

- 미안해. 무안하게 만드려는 건 아니었는데.

아까 먹으려고 집었던 새우튀김을, 정아의 식판에 올려놓았다.

- 작전 성공이다. 사실 새우튀김 때문에 그랬던 거였어. 네 게 더 바삭해 보이더라고

정아가 웃으며 말했다.

- 알아 너 새우튀김 엄청 좋아하잖아.

정아가 웃었., 그래서 나도 웃었다.


36.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정아와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더욱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

정아가 나에게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그 아이를 얼만큼의 크기로 사랑하는가를 증명해 내야 했고, 정아가 나에게 마음을 보낼 때면, 어려운 리듬게임을 하듯 타이밍에 맞춰 비슷한 크기만큼의 마음을 정아에게 돌려보내야만 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버틸 만했다. 어쩌면 나도, 정아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비슷한 류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정아가 은근히 내 손을 잡는 것과,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하는 포옹은 별개의 문제였다. 정아는 이 시기에, 나에게 이유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 곳이 있는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그럴 때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그 아이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으니까


37.

그 해 겨울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적당히 많이 내렸던 게 아닌, 발이 푹푹 빠져서 신발이 다 젖을 정도로.

사실 나는 겨울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성향이 더위보다는, 추위를 훨씬 더 많이 타는 탓도 있었지만, 쌓여있는 눈이 바퀴벌레마냥 꾸역꾸역 겨울을 버티는게 징그러웠기 때문에 그랬다. 나와는 정반대로 정아는 겨울을 무척 좋아했다.

- 하야, 이번 주 주말에 뭐 해?

- 딱히 뭐 없는데? 왜?

- 눈사람 만들러 가자.

정아의 눈이, 놀이공원에 처음 가 본 어린애처럼 반짝였다

- 눈사람? 추운데…

- 가자, 응? 응?

정아가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손이 많이 차가웠다.

- 알겠어, 알았어. 손이 왜 이렇게 차, 이리 줘.

- 당근 가져와.

- 당근은 왜? 추우면 카레 끓여 먹게?

- 눈사람한테 코 달아줘야지.

눈사람을 만들러 다시 만난 정아는, 두꺼운 옷에 파묻힌채, 펭귄같이 뒤뚱거리며 약속장소로 걸어왔다.

- 이거 받아.

정아가 나에게 장갑을 건넸다.

- 이게 뭐야?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 장갑. 나랑 똑같은 거야. 눈사람 크게 만드려면 손이 따뜻해야 돼.

- 정아야, 어디 히말라야로 등산 가? 지금 바로 올라가도 되겠다

정아의 머리보다 훨씬 컸던 털모자가, 계속해서 정아의 눈을 가렸던 탓에, 정아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했다.

- 이것 좀 받아줘.

- 이건 뭐야?

- 삽이랑 초콜릿이랑 코코아… 내가 만든 건, 너가 달다고 할까 봐 두 병 가지고 왔어.

- 미안하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는데… 나는 딸랑 당근 두 개밖에 안 가지고 왔어.

- 시작해 볼까.

아마 두 시간 정도 눈사람을 만들었었나. 처음에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뭉쳤다. 정아가 준 장갑 덕분에, 손이 많이 시렵진 않았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눈사람의 눈썹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눈썹은 솔잎으로 달아주었다. 눈은 고민을 하다가 땅바닥에 있던 돌멩이로 달아주었고, 코는 내가 가지고 온 당근으로 달았다. 눈사람을 다 만들고 나서는, 벤치에 앉아서 정아가 가지고 온 코코아를 마셨다.

- 뭐야, 내 것도, 엄청 단데?

- 어, 이게 너 거다. 미안.

- 너무 달게 마시는 거 아니야? 건강에 안 좋겠다.

- 우리 엄마랑 똑같이 얘기하네.

- 그야, 네가 너무 달게 마시니까…

- 눈사람 이름은 뭘로 할까?

- 이름도 지어줘야 되는 거야? 어차피 녹아 없어질 텐데.

- 헐…

정아가 코코아를 마시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 농담, 농담.

- 하민이 어때?

- 왜 하민이야?

- 너 성이랑, 내 성 붙여서.

- 내년에 만드는 눈사람은 민하로 하자. 그다음 년도에 만드는 건, 하민 2세 그 다다음 년도에 만드는 건 민하 2세. 그렇게 딱 하민 7세 정도까지만 만들자. 그다음엔 말이야,

아, 역시 우린 안 되겠구나. 너랑 나는 그렇게 좋게 끝날 순 없겠구나.

- 응, 나도 좋아. 그렇게 하자.


38. (나 정아 / 종말)

나와 정아는, 눈사람에게 코를 달아주었던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헤어졌다. 그것도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우리가 탈 버스 시간을 보고 있었고 정아는 할 게 있다고 나보고 먼저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건물에서 나온 정아가 나를 와락 안더니,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당황했던 탓에 정색해 버렸고, 그대로 정아를 밀쳐버렸다.

- 뭐 하는 거야?

- 아니… 날씨가 너무 추워서…

- 날씨가 추워서?

- 아니, 아니야. 너가 너무 추워 보여서…

내 호흡이 떨리고 있는 만큼, 정아의 눈 역시 가파르게 흔들린다.

-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 뭐 때문에 그러는데.

- 그냥 싫다고, 좀.

정아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려 가만히 얼어붙는다. 베인 상처 위로 몇 초 뒤 핏방울이 고이듯, 눈물이 베어나온다

- 너, 나 싫어해?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그냥 그만하자.

- …왜?

정아를 납득시킬만한 마땅한 이유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 우리 고등학교 올라가면, 따로 등하교 해야 되잖아.

- 요즘에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너랑 같이 등하교 할 때 했던 이야기들이 좋았던 거지, 네가 좋았던 게 아니었던 거 같아.

- 그래서 손 잡는 것도 피했던 거고, 너가 껴안으려는 것도 피했던 거야. 어, 맞아. 다른 건 다 버텨도, 그건 도무지 못 버티겠더라.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슬픈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바라보지않고 쳐다본다.

아, 이 눈빛. 어디서 봤던 눈빛이었더라. 녹아 없어질 눈사람에, 뭐 하러 이름을 지어주냐고 물었던 때였었나. 어딘가 그때랑은 다른데.

- 쓰레기 새끼

정아는 쳐다보고, 난 바라본다.

-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버스가 도착했다. 정아도 분명 이 버스를 타야 하는데, 나 혼자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는, 내리던 눈만큼이나 펑펑 울었다. 앞으로 다시는 정아를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울었는지, 엄마가 그립다는 마음에 그랬는지, 헷갈렸다.

추웠던 날씨 탓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모르는 반지가 만져졌다. 아, 아까 정아가 넣어 놓았나. 주머니에 있던 반지를 빼서, 집 앞 화단에 쌓여있는 눈 사이로, 반지를 파묻는다. 내년에 봄이 올 때면, 반지도 눈과 함께 녹아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묻는다


물론 내가 바라는 것처럼, 반지는 겨우내 녹아 없어지지 않을 거야, 정아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묻어둔 반지는, 내년 봄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겠지.


+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하룻밤 사이 쌓인 진눈깨비가 다음날 녹아버리듯 끝났다

이따금씩 복도에서 정아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서로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정아에 대한 미안함보다, 나에 대한 가여움 때문에 그랬다.

우린 그대로 졸업 했고, 그 아이는 어디론가 다른 학교로 가버렸다.

이거 봐 꽃은 볼 때만 예쁘지 시들어버리면 흉물스럽다니까.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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