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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연

by 평일
순애 하연 커버.png

39. (나와 하연 / 시작)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동아리 활동에 가장 흥미가 있었다.

나는 방송부에 들어갔고. 송하연은 나랑 같은 방송부였다.

우린 거기서 만났고, 철저한 파트너 사이였다.


40.

사실 방송부에 들어가는 건, 내 계획에는 아예 없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부에 들어갔던 이유는 아무래도 할매의 영향이 가장 컸었다.

내가 정아와 헤어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그러니까 대략 1월 말 즈음부터 할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할매가 처음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는 반나절 정도 병원에 있었다. 그다음으로 쓰러진 건, 2월 초. 두 번째로 쓰러졌을 때는 병원에서 퇴원을 시켜주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할매를 병원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병실에 입원시켰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병원에 직접 오지는 못했다. 할매는 몸집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침대에 누워, 아버지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할매가 입원한 이후로 나는 침대 옆에 간이침대를 펴 놓고, 병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할매는 내가 이런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가끔씩 병실에 들를 때면, 아버지는 나에게 50,60만원 정도의 현금을 쥐어주고 갔다. 이 돈을 받을 때면, 나는 할매의 손자가 아니라, 아버지 회사의 직원이 된 기분이 들었다.

- 쓰다가 부족하면 전화해라.

- 됐어요, 안 부족해요.

아버지도 나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지, 내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폈다.

- 이번에 하는 일만 끝나면··· 아빠도···

- 그전에 잘못되면요?

아버지의 멍한 눈이 잠시 또렷이 흔들렸다. 잠시 날 바라보더니 무어라 운을 떼려다, 아무런 답변을 내주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흐릿했던 아버지의 눈이, 예전에 내가 어항에서 보았던 물고기처럼 보였다. 당시의 아버지도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으려나.

그랬다면 아버지를 더더욱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41.

병실 생활은 따분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아마 할매도 마찬가지였겠지. 이런 권태로움이 극에 달할 때면, 할매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 동제야.

- 응, 할매.

- 티비 좀 틀어봐라.

할매가 티비를 틀어보라는 뜻은, 보통은 동물농장을 틀어달라는 이야기였다.

- 안 본 거 없지 않나? 다 봤던 거 같은데.

- 아녀, 그 새끼 고양이 구출하는 거 아직 안 봤잖어.

- 할매는, 그렇게 동물을 좋아하면서 왜 키우질 않아? 할매 퇴원하면 고양이나 한 마리 기를까? 나도 고양이 좋아하잖아.

- 아유, 털 날려서 싫어. 보기만 해도 저렇게 귀여운데··· 보는 걸로 됐지 뭘.

할매는 동물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양이를. 할매가 고양이 영상을 볼 때면, 어릴 때 나를 바라보던 표정으로 영상 속 고양이를 바라봤다. 그럴 때면 묘하게 질투가 났다.

-우와, 표정 봐. 할매, 고양이가 할매한테 돈이라도 찔러줬대? 나 질투 나는데.

-너는 이제 털 숭숭 나서 안 귀엽잖어.

-저 고양이도 털 숭숭 나 있는디요···


42.

3월에는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할매의 건강은, 동물농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나는 더 이상 병실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요양사를 고용했다.

나는 최대한 할매를 기쁘게 만들어드려야 했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문득 방송부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는,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실에서 잠을 청할 때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병원 침대가 불편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기보다는, 다른 생각들이 마구 떠올라서 그랬다.

할매가 누워있는 저 자리에, 할매가 누워 있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었을까. 개중에 몇 명이나, 자신의 발로 걸어서 병원을 나갔을까.

생각이 깊어질 때면, 덮고 있던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내가 하는 생각들이 새어 나가서 정말로 그렇게 되어 버릴까 봐 겁이 나서 그랬다.

종교는 없었지만, 담요를 뒤집어쓰고 양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상실감은 너무 아프고, 나는 여지껏 잃어버린 게 너무 많다고. 아침이 밝아오면, 할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고, 우리 할매 어제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데? 금방 퇴원하겠네.

할매의 입에 있던 보조장치 때문에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면, 할매는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말로 듣는 대답보다도, 나만 이해할 수 있는 할매의 그런 깜빡임이 훨씬 더 좋았다.


43.

방송부에 아는 선배가 있었던 덕분에, 생각보다는 쉽게 방송부에 붙을 수 있었다. 할매는 내가 방송부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무척 좋아하는 듯했다.

이번에 방송부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날 포함해서 4명이었다. 그중에, 송하연이 있었다.

그 아이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좋아하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싫어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리려나.

송하연은 내가 하는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내가 건네는 인사나, 동아리에 관련된 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나, 동아리 부원들이 다 같이 모여서 수다를 떨 때에도, 내가 하는 말에는 유독 아무런 반응 보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44.

4월에는 일주일 정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은, 그때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다.


45.

할매의 소식을 들었던 건,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반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급하게 나를 교무실로 불렀고,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부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교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에는, 왜인지 식은 땀이 무척이나 났다.

학교에서 나와서는, 곧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땐, 사람들이 할매의 침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할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할매와 눈이 마주 닿았을 땐, 할매가 나를 보고 힘겹게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마음이 편안했다. 나도 할매와 같은 템포로 눈을 깜빡였다. 내가 할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많이 사랑해, 고마웠어. 나는 걱정하지 마.”였는데, 할매는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번만큼은 할매가 보내는 깜빡임보다도, 할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할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댔지만 내가 바랐던 의도와는 달리, 울음이 좀처럼 쉽게 참아지지 않았다.

일정한 템포로 움직이던 할매의 눈꺼풀이, 조금씩 헝클어져 가고 있었다. 엉킨 실처럼 종잡을 수 없이 엉겨가다, 이제는 도무지 풀어 갈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됐을 때, 할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할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훌쩍거리다. 소나기 쏟아지듯 울어댔고,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직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내 옆에 있던 오랜만에 본 가족 아주머니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하셨지만. 나는 어떤 게 괜찮은지, 어떤 게 괜찮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할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울음이 멎어갈 때가 되어서야,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순간까지도 멍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역했던 건지, 눈앞에 있는 현실이 이 순간까지도 믿기지 않았던 건지.


46.

-동제야, 동제야!

할매는 나를 동제라고 불렀다. 지나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내가 엄마의 배를 막 차기 시작할 때즈음에, 할매가 지은 이름이란다. 아, 물론 내 이름은 동제가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에 내 이름이 동제였다면, 나는 학교 다닐 때, 이름표를 떼고 다녔을 거야.

어느 날은 비가 왔고, 나는 할매랑 군밤을 까먹으며 여느 때와 같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 할매, 왜 하필 동제야? 무슨 이름을 그렇게 촌스럽게 지었대.

- 동제가 뭐 어때서, 멋들어지기만하구만.

- 무슨 뜻인데?

할매는 시선을 티비에 고정하고 내 물음에 답했다.

- 구리로 만들었다는 뜻이지. 한자는 다른 한자였어, 오해하지 말어. 뜻이 그랬다는 거지

- 아, 동제가 그런 뜻이야? 철제할 때 그런?

- 그럼.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응수했고,

- 구려.

- 구리긴, 이놈아. 뜻이 얼마나 좋은 뜻인데.

뾰루퉁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지.

- 무슨 뜻인데.

- 다른 애들처럼 힘 꽉 주고 살다가 부러지지 말고, 찌그러지고, 구부러지기도 하면서 유연하게 살라는 뜻이지.

- 차라리 은제나, 금제로 짓지 그랬어. 동은 3등이잖아.

- 동이 왜 3등이여, 너네 할매는, 금이랑 은보다 동을 훨씬 더 사랑혀.

- 그럼 나중에 할매 반지는, 금반지 말고, 동반지로 맞춰 줄 거여.

- 할매는 동도 좋아하는데, 금도 좋아혀.

꿉꿉했던 분위기, 군밤은 참 달콤했고, 티비에서는 지금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안정적, 안정적이었다. 이런 대화를 하던, 어린 시절 나는, 어쩌면 엄마가 평생 바빠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할매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른 건, 병원에서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지.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주변에서도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다들 호상이라고 했으니까. 다만 진료카드에서 처음 본 할매 이름이, 눈에 계속해서 밟혔다.

- 이옥춘 -

아, 할매한테도 이름이 있었구나. 나한테 할매는, 그냥 할매였는데. 할매도 어느 시절에는 이름으로 불렸던 때가 있었겠구나. 아, 이름이 있었구나. 참 촌스러운 이름이다. 그래도 알았다면, 조금은 더 할매를 할매보다 이옥춘 여사님 대하듯 대했을텐데.

할매, 할매 이름도 동제만큼이나 참 촌스러운 이름이네.


47.

나 물고기가 된 기분이야.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표현을 참 시적으로 한다고 좋아하더라. 난 좋은 뜻으로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할매는 이 말의, 진짜 의미가 뭔지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이미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설명을 해 줘도, 좀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를 못하더라고. 그렇다고 안 쓰기엔, 내가 참 좋아하는 표현인데, 그치?

언젠가 할매가 그랬던 거처럼,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날게. 그래 잘 살아볼게. 잘 해볼게.

걱정하지 마, 난 걱정하지 마.


+

처음 겪어본 장례식장은 뭐랄까, 참 기묘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모두가 감정에 몸을 맡기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곳이었는데, 검은 양복들을 입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있는 게, 마치 개미가 땅에 떨어져 있는 녹은 아이스크림 주위에 모여있는 것 같아 보여서 조금 징그럽단 생각을 했다.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저번에 딱 한 번 만났던 아주머니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했다. 돈을 받은 사람들은, 모자란 술과 음식을 내왔고, 돈을 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웃다가 이따금씩 울었다.

장례식장에서의 내 역할은, 조문객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역할이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던 나는, 장례식장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흡연장으로 향했다. 물론 담배를 태우러 간 것은 아니었다. 나에겐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거니와, 당시엔, 제 돈을 주고, 제 건강을 망치는 사람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남들이 뱉는 담배 연기나 몇 모금 마셔볼 심산이었던 나는, 멍하니 흡연장에 서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희한한 담배 냄새가 훅 하고 코를 찔렀다. 그곳에는, 그런 독한 담배를 태워서는 안 될 것 같은 남자애 한 명이, 멍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내 나이 또래로 보였던 그 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그런 피부에서도, 돋보일 정도로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운동을 무척 잘할 것 같은 첫인상이었다.

그냥 내 느낌이, 이 사람과는 엮여도, 아주 단단히 엮일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48.

일주일 만에 간 학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친구들이 건네는 커다란 위로의 말들 때문에 그랬는데, 정작 나는 그만큼의 크기로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쫓기듯 아침 방송을 하러 방송실에 도착했고. 마침 그 앞에는 송하연이 먼저 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송하연은 아나운서였고, 나는 아나운서가 읽을 대본을 쓰는 작가였다. 우린 같이 아침방송을 진행했다.

- 안녕, 오랜만이네.

- 어, 안녕.

하연이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 아, 맞다. 대본에 몇 개 추가해야 될 거 있는데. 불러줄까? 필요하면 메모장에 써서 주고.

- 써서 줄래?

- 잠시만.

메모장을 건네받은, 하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메모장을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 좀 악필이지, 미안.

- 응, 좀 그런 편이네.

- 처음 시작할 때, '안녕하세요, 방송부 아나운서, 송하연입니다' 앞에, '완연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하고 뒤에 멘트 읽어주면 돼. 그리고 중간고사 날짜 바뀐 건 알 거니까··· 그거는 바뀐 날짜로 읽어주면 되고, 중간 부분 한 번 봐 볼래? 이거는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데, 사자성어 소개하는 부분 할래, 뺄래? 나는 빼는 게 좀 더 매끄러울 거 같다는 생각은 들던데.

- 넣어서 방송할게.

- 그래. 그건 넣는 걸로 하고. 마지막 인사 부분도 바꼈어. '피어나는 벚꽃보다, 만개할 여러분들의 미래가 더욱이 아름다운 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얼마 없었던 이유로, 내가 하는 말이 빨라짐에 따라, 펜을 쥔, 하연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동시에 하연의 교복 소매가 조금씩 올라갔다. 맥락 없이 하연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얇상한 게, 되게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49.

완전한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받아본 적 있는지.

이를테면, 이렇게.

아주 추운 겨울 밤, 당신은 굽이진 골목길을 지나 험했던 길만큼이나 고됐던 하루를 끝마치고, 마감시간에 간신히 맞춰 타코야끼집에 도착했다.

- 저··· 타코야끼 6개 포장 부탁드릴게요.

당신의 하루는 타코야끼를 주문하는 것마저도 버거울 만큼 고됐고, 간신히 주문을 마치고 난 후에는 버터 녹듯 의자에 털썩 녹아버린다. 그리고 개 같았던, 오늘 하루를 회상하며, 똑같을 내일 하루에 대한 예상에 한숨을 푹푹 내쉰다.

- 주문하신 타코야끼 나왔습니다.

- 감사합니다.

당신은 타코야끼를 받아들고, 계산을 하기 위해 카드를 사장님에게 건넨다. 카드를 받아든 사장님이 시선을 포스기에 고정한 채 말한다.

- 타코야끼 좀 더 넣어드렸어요.

- 네?

- 어차피 저도, 이제 문 닫고 집에 가봐야 돼서요.

- 아··· 감사합니다.

-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가끔은 철저한 타인이 건네는 위로가, 오롯이 나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의 위로보다도, 따뜻하게 와닿을 때가 있다. 더 넣어 준 타코야끼를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50.

철저한 타인이라던가 뜬금없는 타코야끼 이야기라던가, 어째서 주제와 벗어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아침방송을 끝마친 송하연이 부스에서 나오고 나서부터였다.

- 고생했어. 다음 동아리 시간에 보자.

늘 그랬듯, 걔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자. 로 끝난 내 말이 벽 이곳 저곳에 부딪혀 무안하게 힘을 잃어버렸다.

- 얘기 들었어. 많이 힘들었겠다.

방송부는 언제나 경쟁률이 높지만, 특히 올해는 아나운서의 지원자 수가 평소의 배를 웃돌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네가 그렇게 경쟁자가 많았던 아나운서로 뽑힌 이유가 바로 납득이 가더라니까.

-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 고생했어.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간신히 심장에 비껴 박히던 하연의 말들이, 이번엔 정확히 심장에 박혔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라는 말보다 '고생했어'라는 말이 그랬다. 고생, 그렇지 고생. 난 고생을 해왔지. 알아주지도 않는 고생을, 아무도 모르게.

이어서, 눈물이 떨어졌다. 처음엔 한 방울, 다음엔 두 세 방울, 다음엔 걷잡을 수도 없이 많이.

당황한 하연이, 토하는 사람을 달래듯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따금씩 감정이 더 큰 폭으로 요동칠 때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이상하게, 그럴수록 눈물이 더 쏟아져 나왔다.

하연이 날 깊은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바닥으로, 밑바닥으로. 축축한 곳으로, 예전에 소각하지 못했던 감정이 있는 곳으로.

구역감이 밀려왔다. 하연이 날 부드럽게 안아, 등을 토닥거렸다. 나도 널 안았다. 구역감과, 울음이 점차 멎어갔다.

- 다 울었어?

- 응.

하연이 팔을 풀어, 나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나 역시도 거의 밀치듯, 하연으로부터 물러났다. 상황이 끝나가니, 불현듯 불안해졌다.

- 나 운 거 다른 사람한텐 말 안 해 줄 수 있어?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 안 할게.

- 고마워.

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교복에 싫어하는 사람의 눈물이 묻어서 화가 났을까? 타코야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태우지 못하고 남은 감정들은, 의식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저 그런 불쾌한 것들이지만, 그런 감정들을 꺼내놓고 마주 봐야 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늘인 양 서늘하게 다가와, 그림자처럼 부풀고 늘어나며 행복했던 감정들까지 몽땅 토해내라고, 붙잡고 날 이리저리 흔들 것이다. 자기는 그저 그런 불쾌한 것 따위가 아니라고, 머지않아 자길 주위로 그런 음침한 것들이 덩이 지고 몸집을 불려 땅을 뚫고 나올 것이라고 경고를 하지. 그날 하연이는 차가운 모습이 아닌,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을 내게 처음 보여줬다. 나 역시도, 내가 우는 모습을 할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처음 보여줬다.

하연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만큼, 나 역시도 너에게 그만큼의 거리를 둬야겠다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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