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틑어진

나와 탄

by 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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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날 산책이 끝나고 탄과는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만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탄을 피해 다녔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려나. 그건 내가 탄에게 건네는 일종의 배려였다. 내 고민까지 그에게 떠안게 하지 않기 위한 배려, 형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시간을 주는 배려.

내가 아는 형은 단단한 사람이니까. 형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니까.


12.

오랜만에 탄을 만난 건, 수능 전날이었다.

나는 형에게 응원 선물을 주러, 형네 학교를 찾아갔다.

- 어이!

탄이 멀찍이서 걸어왔다. 오랜만에 본 탄의 상태는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 아이, 뭘 또 이런 걸 준비했어 부끄럽게.

- 이런 동생 없다 진짜.

- 알지 알지.

- 빨리 열어봐.

- 뭐 들었는데.

- 아, 말 좀 그만하고 그냥 좀 까봐.

형이 봉투를 뒤지더니, 담배 한 보루를 꺼냈다.

- 뭐야. 왜 담배가 보루로 나와.

- 두 보루야. 초콜릿은 내일 쉬는 시간마다 까서 먹고, 청심환은 평소에 안 먹었으면 그냥 버려. 물어본다는 걸 까먹어서, 일단은 샀어. 틈틈이 담배도 잘 펴주고. 흡연자들은 담배 안 피우면 집중 못 한다며.

- 담배는 어떻게 구했냐.

- 형도 민짠데, 담배 잘만 사서 피우잖아.

- 돈 좀 많이 썼겠는데.

- 우리 집에 돈 많아

- 잘 치고 와라. 형이 내일, 내가 갈 학교 정하는 거 알지?

탄이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탄과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우린 서로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수능이 끝나고, 뉴스가 나왔다. 이번 수능이 손에 꼽힐 불수능이었다는 뉴스였다. 걱정은 딱히 하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탄은 내게 곧장 해외여행을 갈 예정이라는 문자를 남겼다. 돌아보니 살면서 아직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고. 되도록이면 멀리 갈 예정이니 연락이 안 되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많은 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이젠 정말 끝났으니까.


13.

수능이 끝나고, 꽤나 시간이 흐른 후 탄이 지원한 학교 세 개 중 두 학교를 붙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탄에게는 굳이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다. 두 학교 다 무척 좋은 학교였기에, 나는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지만서도, 큰 이변 없이 수능을 마쳤던 탄이었기에,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학원에 향했다.

- 학원에 별 하나 떴다 그죠. 내년에 학원 홍보 확실하겠는데요?

- 아, 탄이? 그치. 탄이 시험 잘 봤지.

- 뭐야, 반응이 왜 그래요?

- 탄이 재수하잖아.

- 네?

카운터에 앉아있는 선생님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 시험 끝난 다음 날 탄이네 아버님이 학원 오셨었어.

심장이 철렁하고 가라앉았다.

- 아?

- 뒤에는 대충 알겠지? 탄이네 아버님 이쪽으로 워낙 유명하시잖아…

선생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억을 간신히 더듬어, 곧장 탄네 집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나왔던 건 탄이 아닌, 탄네 씨발새끼였다. 평소에 형이 묘사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 속에서 '이 씨발새끼야'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 누구니?

그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 탄이 형, 친군데요.

- 탄이 지금 공부한다.

짧은 말을 남기고, 형네 집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탄을 만날 수 있지? 탄은 괜찮나? 정신적으로? 아니 육체적으로? 혹은 양쪽 다 아니라면? 불그스름한 멍이, 검은 탄의 몸을 뚫고 온몸을 뒤덮고 있다면? 나는 그런 형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겁을 먹지 않을 수 있나? 앞으로 탄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나는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나? 아니 살아갈 수 있나? 눈앞에 있는 문만 부수면 형을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칼? 아니면 망치? 사람을 사서 탄네 집으로 쳐들어 가야 하나?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도무지 한곳으로 모이지 않았다.

한참을 서서 온갖 생각을 하던 내가 결국 선택했던 건, 야속했지만, 칼과 망치 따위를 잡는 게 아니라, 조용히 학원에 가서 펜을 잡는 것이었다. 탄이 떨어진 학교를 목표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야 탄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래야만 내가 탄을 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탄을 살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 탄은 행복할 수 있다 그래야지만 탄이 내게 기댈 수 있다 그래야지만 내가 탄에게 기댈 수 있다 그래야지만, 씨발 씨발 씨발 그래야지만.

어떤 일들은 하지 않고선 도무지 살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나한텐 이 일이 그랬다.


14.

3학년에 올라오고 나선, 가끔씩 정신이 아득해질 때가 있었다.

잠깐 대화의 흐름을 놓치면,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가 바뀌어있다거나, 분명 오늘은 수요일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서 달력을 봤을 때 금요일이 되어있다거나, 방금 아침을 먹으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았는데, 다시 한번 바깥 풍경을 보았을 때는 땅거미가 내려앉아 가로등이 켜져 있던 일들이 생겼다.

다행스러운 점은 9월이 되고 나서는, 이런 일 희한한 일들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신 하연이는 이맘때즈음에 내가 조금 무섭다고 했었다. 어딘가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했었나. 하연이에겐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나는 하연이가 하는 그런 말들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돌아올 거니까. 이번 시험이 끝나면, 탄과 함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거였으니까.


15.

수능 전 날은 무척 추웠다. 사람들은 이걸 보고 수험생들의 한이 서려서, 이맘때쯤 찾아오는 '수능 한파'가 찾아왔다고 호들갑들을 떨었고, 나는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렸지.

시험을 칠 학교를 돌아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탄이 담배를 자주 피우던 골목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탄이 그리워서라기보다는, 탄이 뱉는 담배연기가 그리워서 그랬다.

탄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여름보다도, 특히 겨울에. 그때 탄이 뿜는 담배연기는, 탄의 몸집보다도 몇 배는 크게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럼 탄의 실루엣이 연기에 가려서 흐릿하게 보였고 연기가 완전히 걷히고 나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 탄의 모습이 참 듬직했다.

골목에 다다랐을 땐, 마침 연기가 자욱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연기가 걷힐 때까지 실눈을 뜨고, 한 곳을 응시했다. 연기가 하늘 위로 바스러지고, 날 먼저 알아봤던 건 탄 쪽이었다.

- 어? 뭐야.

- 형!

그건 분명 탄이었다.

- 오랜만이다?

하지만 내가 알던 탄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여러 이유로 그랬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건, 탄의 짙은 머리카락과 눈썹이 보이질 않았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기보다는,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신생아처럼,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았으려나. 무엇보다도 형은 내가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온종일 지치지도 않고, 운동장을 달릴 수 있을 듯했던, 탄의 팔과 다리가, 과학실에 있는 뼈 모형 위에 싸구려 인조가죽을 덧대어 놓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볼품없이 흔들렸다.

- 잘 지냈냐?

- 어… 잘 지냈지.

- 잘 지냈어 형?

- 뭐, 그럭저럭?

탄이 씩 웃으며 담배를 한 대 더 꺼냈다. 하지만 이번엔, 도무지 형이 부리려는 마술에 속아줄 수가 없었다.

형이 꺼낸 담배를 내리쳤다. 담배가 바닥에 힘없이 뒹굴었다.

- 그럭저럭?

- 야아… 아파.

탄을 골목 벽으로 세게 밀쳤다.

- 화라도 내.

- 수능 전 날에 이렇게 힘 다 빼버리면, 내일 시험 어떻게 보려고 그래.

- 씨발 빨리 화라도 내라고.

형을 때렸다. 차마 세게 때리진 못했다. 세게 때리면, 정말로 형이 망가져버릴까봐, 그러진 못했다. 도통 분이 풀리지 않아서, 형이 기대고 있던, 벽을 마구 내리쳤다. 꿈쩍도 하지 않던 형이 그제서야 화를 내며, 내 손을 붙잡았다.

- 야, 너 미쳤냐?

맞은 사람은 형이었고, 때린 사람은 나였다. 그런데 울고 있는 사람도 나였고,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역시도 나였다. 탄이 울고 있는 날 불쌍하게 바라봤다.

지금 누굴 불쌍하게 바라보는 거야, 형. 지금 불쌍한 사람이 대체 누군데.


16.

탄이 날 위로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도 탄과 내가 목표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같았다. 우린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 시험 잘 봐라.

- 형도.

문득 형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 형, 시험 끝나고 목…

하려던 말을 잇지 못했다.

- 어?

이번엔 형이 걱정되어서라기보다, 이젠 내가, 형의 몸을 볼 자신이 없었던 이유가 좀 더 컸다.

- 목이나 시원하게 축이자고. 나 그날, 형네 집 기둥 하나 뽑을 예정.

탄이 호탕하게 웃었다.

- 야, 세 개 뽑아가도 되니까, 시험이나 잘 치고 와서 얘기해.

나도 탄을 따라, 웃었다.

- 그래, 그러자.

탄을 등지고 뒤를 돌았을 땐, 이것저것들을 생각했다. 의외로 떠오르던 생각들은, 축축한 기분과는 다르게 밝은 미래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와 탄에 대한 생각, 내가 다닐 학교, 미래, 하연에 대한 생각 조금…

- 야!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갑자기 지른 소리에 흠칫하고 놀랐다. 탄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이거.

탄이 나에게 담배를 한 갑 건넸다. 작년에 내가 준 담배랑 똑같은 담배길래,

- 뭐야, 이거 내가 준 거 아니야?

- 맞아.

- 이걸 날 왜 줘? 나 담배 안 피우는 거 알잖아.

- 그냥… 맛없어서. 다른 걸로 바꿀 거야.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탄이 준 담배를 손에 쥐었다.

- 나 간다. 다음에 보자.

- 응…


17.

다음에 볼 사람에게, '다음에 밥이나 한 번 먹자'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정말로 다음에 볼 사람에게는, '다음에 보자’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시험이 끝나고, 탄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탄이 내 전화를 피하는 걸까 싶어, 공중전화로도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만 원짜리를 동전으로 바꾸어 모두 돌려 받을 때까지도 탄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18. (나 탄 / 종말)

탄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과 별개로, 수능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비록 원하는 과는 아니었지만, 나는 목표로 하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즈음에, 우리 동네에서는 이상한 소문 두 개가, 동시에 함께 돌아다녔다. 극성이었던 한 아빠가, 수능을 망친 아들을 때려 죽였다는 소문과, 우등생이었던 한 학생이, 극성이었던 아빠를 찔러 죽였다는 소문이.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실험을 해야만 한다.

우린 방금 1시간 뒤 50%의 확률로 독가스가 나오는 상자 안에 고양이를 한 마리 넣었다. 시간은 모두 흘렀고, 고양이를 넣었던 상자 앞에 다시 서 있다. 고양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고양이의 생사 여부는 상자를 직접 열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탄의 집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탄이 죽었는지 죽였는지 알 수 없다. 나는 탄이 살아 있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탄을 일종의 중립 상태로 두고, 상자에 풍선 다발을 묶어 하늘 위로 날려보내기로 했다.

탄이 내 시야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걱정보다는 안심이 됐다.

탄은 살아 있다, 분명 탄은 살아 있다. 다만 놓쳐버린 풍선같이,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갔기에, 내 눈으로만 볼 수 없는 것뿐이다.

탄이 날아가 버렸다고 해서, 크게 바뀐 건 없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 그리고 하연이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았고, 탄이 자주 나다니던 곳들과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골목에 탄이 없었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게 똑같았다. 그뿐이다. 딱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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