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문명
무거운 철 덩어리를 하늘 위로 띄울 생각을 하는 인류의 상상력부터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이 편하게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된 그야말로 모성애가 만들어낸 발명품인 주름 빨대까지 우리 인류가 쌓아온 문명은 상상 이상으로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근데 오늘은 어쩐지 나를 둘러싼 인류의 것이 지겹게 느껴져 앉아있던 카페를 박차고 나와 무작정 동네에 있는 뒷산으로 갔다.
비가 와서 축축하게 젖은 흙바닥에 숨이 턱 막히는 습한 공기가 나를 반겨 나는 내가 아끼던 하얀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마냥 걸었다.
이어폰을 빼고 오래간만에 듣는 벌레소리 새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처음 산 무선 이어폰의 음질에 감동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감동이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생명이 태동하고 자라나는 소리, 정제되지 않은 날 것들의 소리가 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아무도 없던 산에서는 코와 입을 답답하게 막고 있던 마스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마스크를 벗자 문명 속에서는 느끼기 힘든 푸르고 초록색 향들이 내 폐를 가득 채웠다.
진한 향을 뿜는 풀들, 바닥을 분주하게 기는 벌레들, 신나게 우는 이름 모를 동물들까지 내가 나의 문명 속에서 분주하게 살고 있을 때 그들도 그들의 문명 속에서 분주하고 바쁘게 살고 있었다.
짧은 산책이었지만 많은 경험을 한 인상 깊은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