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수술 날짜를 잡고 입원을 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계신분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였다. 자녀들이 성인이 된, 우리 어머니 나이대의 분들이셨다. 그중 내가 가장 어려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아직 30대 초반인, 젊은 나이에 암 환자라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듯 저려 왔다. 건강하게만 살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고 감사하겠지만, 피할 수 없다면, 언젠가 걸려야 할 암이라면, 나도 나이가 더 든 뒤에,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된 뒤에 암에 걸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생각을 했다. 병실 침대에 앉아,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나는 이러한 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수술을 하고 난 뒤에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말을 꺼내고 싶었다. 한창 젊고 건강할 나이에, 아픈 것이 자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혹 나중에 알면 서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말은 꺼냈지만, 속은 후련하지 않았다. 오히려 씁쓸했다. 아마도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리면,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이 보다 확실해지는 듯한 느낌? 현실적으로 와 닿는 기분?이 들것만 같아서, 그럼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이고 초라해질 것만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친구 중 한 명은 “우리 시어머니도 갑상선암 수술하셨는데 지금은 괜찮으시더라.”라고 말했다. ‘시어머니’. 자식이 성인이 된 뒤, 장가보내고 난 다음.. 나도 지금말고 우리 아들 건강하고 바른 성인 될 때까지 잘 키워놓고 장가보내고 난 다음, 차라리 그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갑상선암은 로또암이라더라.”라는 말을 들었다. ‘로또암’. 아픈데 로또가 무슨 소용이야.. 그러한 걱정과 위로의 말은, 나에겐 오히려 더 큰 좌절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내가 암이라는 병에 걸리고 나서야 살갗에 닿듯 와닿은 사실이 있다. 암이라는 병은, 젊을 수록 위험하다는 것이다. 젊을수록, 몸 속의 세포 활동도 활발하여 암세포가 있다면, 전이될 속도나 확률도 높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경험하고 나서야 그러한 현실들이 마치 피부처럼 살갗에 와 닿았다. 나도 만약, 지금이 아니라 어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라면, 보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나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수술 당일이 다가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머니는 집에서 첫째 아이를 돌보아 주시느라 오지 못하셨다. 남편은 또다시 휴가를 쓸 수 없었기에 출근을 해야만 했다. 혼자 수술을 받을까 하다, 보호자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친언니가 휴가를 내고 곁에 있어 주었다. 괜찮을 거라고, 무서워 하지 말고, 수술 잘 받고 오라던 언니의 말을 뒤로한 채, 나는 딱딱한 침대에 옮겨 누워, 수술실로 들어서기까지 흔들흔들, 덜컹덜컹 이동해야 했다. 수술실로 향하는 그 기분, 그 길이 너무나 싫었다. 얇은 환자복 때문에 추웠는지, 수술을 앞두고 두려워서인지, 내 몸이 가늘게 떨려옴을 느꼈다. 수술실에 도착한 듯 이동 침대가 멈춰 섰고,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여러 명의 의사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니, 무서워서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 혼자 발가벗은 채 누워있는 것만 같이 떨렸고, 두렵고, 무서웠다. 천장만 바라보려 노력했다. 수술실에 들어섰을 때였는지, 구름이 그려진 하늘 배경의 천장이 보였다. 예쁜 하늘을 그려놓은 천장이었음에도, 그 천장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편안해지기는 커녕, 두려움이 몰려왔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바라본 천장은, 다시 떠올려 보아도, 너무나 싫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천장이다.
“목으로 하기로 했지?”
“네..”
곧이어 담당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수술이 시작되려나 보다. 모르는 장소,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나를 내맡긴 기분. 그 두려움과 외로움. 그 순간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게 나는, 목에 수술 자국을 선명하게 남긴 채 30대를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