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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즈골드 Oct 29. 2020

워킹맘, 이렇게 힘든거였나? 상처만 남긴 외로운 싸움

 누군가 나에게, ‘워킹맘이였을때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난 망설임 없이 ‘아이가 아플 때’라고 말할 것이다. 내 아이가 아플 때, 옆에서 지켜주고 보살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다. 당장이라도 아이에게 뛰쳐 달려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을 때.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회사에서 일을하고 있을 때,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역시나 전화가 올 때는 대부분 아이가 아프다는, 열이 난다는 소식이였다. 지금은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확실히 그런 상황이 거의 없지만, 어릴 때일수록 종종, 자주 아팠다. 목이 부어도 고열이 나곤 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일하는 도중에 갑자기 일이 있다고 반차를 쓰거나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내 가슴은 미어지듯 아픈데, 그 사정을 따스한 마음으로 이해해 줄 회사는 없었다. 고열이 나서 하원을 시켰으면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연락이 올 때면, 지금 당장 퇴근해 갈 수 없던 나는, 친정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부탁을 해 보거나 혹 일을 하셔서 오실 수 없는 상황이면 다른 지인에게 전화를 해 부탁을 해야 했다. 또 하원 시킨 후에 병원에 바로 데려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을 때면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해 죽을 것만 같다. 다니던 회사에서 반차나 휴가를 사용할 때면 당일 신청은 거의 불가능했다. 일주일 전이나 적어도 하루 전에는 말씀을 드려 양해를 구하고, 결재 요청을 드리고 결재를 맡아야 했다. 그날 그날 해야 할 업무들이 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우면 업무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내 온 정신과 마음은 아이에게 가 있는데, 나는 업무를 마무리 해야 했다. 아이 걱정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른채 퇴근시간이 다가와서야 자리를 박차고 달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병원 문이 닫힌 저녁시간에 도착한 나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해열제를 먹이고 물에 적신 수건을 아이 머리 위에 올려줄 수 있을 뿐이었다. 요즘엔 늦게까지 야간진료를 하는 소아과 많은 것 같으나 그 당시에, 우리 동네에는 없었다. 진료시간이 6시까지 였고 일주일에 딱 한 두번만 6시 반까지였다. 그럼 마감 전에 5시 반이나 6시까지 접수를 해야만 했는데, 나나 남편이 칼퇴근하고 집에 가면 7시가 넘는 시간이였다. 그럼 그날은 소아과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내가 엄마이면서 아픈 아이를 두고 지금 뭐하는 짓인가’, ‘계속 일을 해야 하나’, ‘이게 과연 누굴 위한 일인가’. 라는 생각 들로 너무나 슬프고 좌절 스러웠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슬픈 건, 아이가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39도가 넘게 나는데도, 밤새 간호는 못해 줄 망정, 피곤하다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자신이 스스로 너무나 미웠다. (첫째 아이가 아기였을 때, 고열이 나 응급실에 뛰쳐갔었는데, 몇 시간동안 아이를 눕혀만 놓고 오지도 않는 당직 선생님을 기다려야만 했던, 시간만 흘려보내고 아픈 아이를 방치만 하는 경험을 했기에 응급실엔 왠만해서는 가지 않으리라 늘 다짐했던 터였다.) 평소에 잠이 안 와 늦게까지 자지 않는 일도 많았던 나는, 왜 그럴 땐 꼭 너무나 피곤하고 졸려서 미칠 것 같은 것인지 내가 너무 원망스럽기만 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기에 피곤해서 일테지만, 아이가 아픈데 옆에서 졸리다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보면, 스스로 엄마로서 자격이 있나 싶어,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자책도 많이 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해야 하고, 약 12시간 가까이 다른 사람 손에 맡겨야 한다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부모로서의 죄책감, 내 아이가 혼자 남아 있을까봐 6시가 되기를 바라고 바라며 칼퇴를 할 수밖에 없고, 아이가 아플 때, 맡길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맡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해야하는 엄마인 나에게, 따스한 눈빛과 마음으로 위로해 주고 이해해 주는 이는 회사엔 없었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도, 아직 아이가 없을뿐더러, 결혼도 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의 경우에도 같은 팀에서, 차장님 이하 결혼한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아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툭툭 말하는 동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픈 우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 가슴은 미어지듯 너무나 아파왔다. 모든 것은 부모인 내가 감당해 나가야 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나와 아이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며 누군가 알아주지도 않는 외로운 워킹맘 생활을 이어나갔다. 내 몸과 마음이 지쳐갔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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