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아이가 분유를 먹다가 갑자기 분수토를 해서 늦은 밤에 응급실로 뛰쳐가기도 했고, 100일 이전에 고열이나 응급실에 갔다가 입원을 한 달 가까이 하기도 했다. 작디작은 아기의 몸에 주사 바늘을 꽃기 위해 여러차례 찔러보는 가슴 아픈 순간을 지켜봐야 하는 일도, 돌도 안 된 아기가 이 검사, 저 검사를 받아야 했던 일도, 여기저기서 우는 다른 아기들로 제대로 쉴 수도, 잘 수도 없는 다인실에서 보내야 했던, 병원에서의 그 한 달이란 시간은,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괴로운 추억이 되었다. 아이가 아플때면 모든 것이 부모인 내 탓 같았다.
당시 친정 부모님은 일을 하시는데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셨기에 오신 날을 손에 꼽을 만큼 거의 오지 못하셨고, 시댁은 한국에 계시지 않았기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나와 남편, 둘만이 감당해야 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엔, 오로지 나 뿐이었다. 정말이지 울고 싶은 마음뿐 이였고, 실제로 많이도 울었다. 남편도 미웠고, 세상도 미웠다.
첫 육아가 너무도 힘겨웠던 나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았다. 요리도 잘 못 하는데다, 평소에도 워낙 밥을 잘 챙겨 먹지 않았던 터라 힘든 육아까지 감당하려니 입맛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쓰러졌다. 언제 어떻게 쓰러졌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온몸에 기운이 없고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은 순간, 남편에게 전화를 했었던 것 같다. 남편이 달려온 뒤, 나는 병원에 갔다. 링겔을 맞았다.
나는 요리뿐만 아니라 육아에도 소질이 없나 보다. 육아가 그렇게 힘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쓰러진 경험을 겪고 난 뒤, 엄마인 내 몸부터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박육아 말고, ‘나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육아보다 일을 선택했다. ‘이러다가는 죽겠다.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매일 힘들어하고 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느니, 그것이 아이에게도 좋은 선택일 것 이라 생각했다. 나를 우선으로 둔, 이기적인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이유 뿐만은 아니였다. 외벌이 생활 이후로 금전적인 문제를 늘 품고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엔 지급해야 할 대금도 제대로 지급 못 할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일을 해야만 했다. 금전적인 문제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지만, 죄책감을 갖고 그렇게 나는 워킹맘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출근하게 되어, 어린이집 적응 기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아직 돌도 안 된 아이를 집 근처 어린이집에 맡기게 되었다. 가슴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였기에 워킹맘이 된 뒤로도, 오로지 나와 남편 단 둘이서, 육아와 일을 감당해야 했다.
그토록 원하던 ‘나의 일’을 찾아 직장에 다니게 되었는데, 현실은 냉혹했다. 이전과 다르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의 직장생활은 너무나 치열했다. 엄마인 내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린이집 오픈 시간이었다. 늦지않게 출근을 하기 위해선 일찍이 집을 나서야 했지만 내가 출근해야 하는 그 이른 시간엔, 어린이집이 오픈하지 않았다. 또 아이도 잠에서 깨어 있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잠들어 있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 맘마도 제대로 못 먹인 채 자고 있는 아이를 안고 등원 시킬때면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출근 시간 못지않게 퇴근 시간 또한 전쟁이었다. 어린이집 문을 닫기 전까지 아이를 하원 시키기 위해선, 칼퇴근을 위해 6시 땡 하고 뛰쳐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이는 것은 기본이고,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종종 생겼다.
지옥철을 타고 어린이집으로 달려가면, 늘 우리 아이만이 혼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고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오면 뻗기 바빴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쳤다. 집 또한 경제적 여력이 안 되었기에 직장과 거리도 멀었고, 아이 키우기에 적합하지도, 쾌적한 환경도 아니였다.